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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영화 <숨바꼭질>에는 얼굴 없는 사람이 나온다. ‘센트럴캐슬’이란 호화찬란한 이름의 아파트단지에 사는 성공한 가장 성수(손현주)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도무지 그 얼굴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두꺼운 잠바를 입고 헬멧을 눌러쓴 채 고급 아파트 단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정체불명의 사람은 성수 내면의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귀환,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비롯된 어떤 정신적 외상을 돌아보게 한다.


모름지기 대상의 실체를 알 수 없을 때 공포는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성수가 절대 알 리 없는 지방 소도시의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영화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어쩌면 이것은 관객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연쇄 살인마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거꾸로 중산층 가장이 무엇을 공포로 느끼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갖는 이런 시선마저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임을 냉정하게 인정한다면 그리 성낼 일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사회’가 그들을 ‘바깥’으로 내몰며 ‘괴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8년 전인 2005년 여름, 프랑스 파리 외곽 방리유에서 발생한 대규모 청년 소요의 의미와 원인을 추적한 연구서 <공존의 기술>에서 공저자들은 공화주의를 자랑하는 프랑스 사회가 어느새 방리유의 청년들을 영원한 국외자들, ‘괴물’로 취급해왔음을 드러낸다. 프랑스에 포함돼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권리와 지위에서 배제된, 사회의 주변인·소수자·이방인인 그들을 이러한 포함 혹은 배제의 역설이라는 ‘공존의 기술’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런던 교외 지역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스물아홉 흑인 청년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 사태는 런던 중심가와 주위 도시들로 번져 일주일간 런던과 그 인근을 혼란에 빠뜨렸다. 장기적인 경기침체 속에서 빈곤의 늪에 빠진 청년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불만들이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에너지가 아니라 불만을 느끼는 이들의 파괴적인 폭동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정치의 부재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대안이 아니라 파괴를 낳고 있는 것이다.


폭동진압에 나선 영국 경찰관들이 토트넘에서 불타는 건물 앞에 서 있다. (출처 : 로이터연합)


실은 <숨바꼭질>을 보고 숭례문 방화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언론과 정부는 충격 속에서 문화재에 대해 아끼는 마음과 도심 치안의 강화를 강조했지만, 그 방화범이 도시 외곽의 철거민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도시 바깥에서 건설자본에 의해 살 곳을 빼앗긴 노인은 방화범이 되어 도시의 상징을 불태웠다. 마치 영화 <숨바꼭질> 속의 살인마가 빼앗긴 ‘집’에 대한 박탈감과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강박증적 히스테리로 ‘괴물’이 되었듯이 말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극단적인 이야기다.


숭례문 방화 현장 검증에서 범인 채모씨가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화된 이후 우리는 삶의 불안정성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안정적인 직장과 주거권을 위해 사회적인 대안을 내놓고 행동하기보다는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뛰어들어야 했다. 사회운동이 불행한 삶의 대안이 되지 못하자 정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는 옷장 안에 숨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는 아이가 어른들처럼 괴물이 되지는 않을까 불안한 예감을 지닌 채 끝난다.


이 땅의 노동자, 영세자영업자에게서 ‘희망’이라고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시대다. 경기침체와 전세대란은 익숙한 현실이 됐고 우리는 좀 더 고삐를 죄어 낮은 임금으로 더 오래 일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운동은 점점 몰락하고 있고, 자본의 착취는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숨바꼭질’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선 이들이 있다. 스스로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으로 뭉쳐 싸우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케이블 비정규직, 다산콜센터, 골든브릿지, 유성기업, 보워터코리아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도시의 불안은 빼앗긴 자들을 배제하고 바깥으로 내몰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찾고 착취의 세계를 끝낼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사라질 것이다.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기, 이처럼 스스로 대안을 만들고 희망을 지키는 ‘공존의 기술’을 절박하게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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