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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샵(포토샵)’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뽀사시’하게 만드는 기술이 핵심이었다. 그 핵심 기술은 이제 유행이 지났지만, 사진에서 약간의 보정은 필수 과정처럼 정착했다. 포토샵이 일상화되다 보니 어쩌다 마주치는 여권 사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보정 기술을 전혀 쓰지 않은 여권 사진의 내가 실제의 나와 가장 가까운 모습인데도 말이다. 사진뿐만이 아니다. 너무 흔해져 성형했다고 하기도 뭣한 쌍꺼풀 수술처럼 언어에도 ‘뽀샵’ 기술이 일상화된 느낌이다.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정명(正名)’은 고사하고, 본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체’가 그 대표적인 예다. 완전체의 사전적 정의는 ‘완전히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완전체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엇인가가 완전히 결여된’ 사람을 지칭한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마음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진지한 대화나 교류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완전체를 이해하기 힘든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 내 의견과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며 악으로 간주되기까지 하니 말이다. 지난주 열린 국내 최초 동성 결혼식에 인분과 된장을 섞어(심지어 먹어보기까지 한 후에) 투척한 기독교 신자(?)가 대표적인 예다.


 

결혼식장에 난입한 동성결혼 반대론자(출처: 경향DB)



영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외우게 되는 표현인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요 근래 대화를 나누다보면 한국어를 사용 중인데도 “I’m fine, Thank you, And you?”와 같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종종 느끼곤 한다. 질문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답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상대방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거나 원하는 대답과 다르게 말할 경우 가차없이 ‘소통 불가능’의 딱지가 붙는다. 이런 식의 비공식 발급 딱지는 꽤 여러 가지로 늘어났는데 특히 온라인상에서 소수자나 약자들에게 자주 발급된다. 예를 들어 얼굴색이 다른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법체류자’란 딱지를, 운전이 서툰 여성이면 ‘김여사’ 딱지를 붙이고 비난하는 식이다.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 ‘편하게 있어’는 어떤가? 이 코너는 직장 상사의 집에서 불편하게 머무는 부하 직원의 모습을 그리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편하게 있으라”고 하면서 구십이 훌쩍 넘은 상사의 아버지가 노구를 이끌고 알탕을 끓여온다거나, 상사의 해외 가족여행 티켓을 주면서 휴가를 다녀오라고 권한다.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있으라고 땀 흘리며 강권하는 상사의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불편하다. ‘편하게 있어’가 원래 문장의 뜻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는데,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반감은커녕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오용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런 반응 자체가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편하게 있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고 정말 편하게 앉아 있다가는 눈치 없고 사회생활 할 줄 모른다고 한 소리 들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사실 TV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언어의 불일치는 현실에서도 이미 충분하다.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던 재벌 회장부터 4대강을 녹차라떼로 만들어놓고 ‘녹색성장’을 말하던 정부, 전화를 걸면 대뜸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치는 상담원까지… 정직과 녹색, 그리고 사랑은 이렇게 쓰이라고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지 않은가.



남미 에콰도르 해안 도시의 동네 어부 아저씨들과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를 보고 신이난 덩헌 씨의 아들 한규 (출처: 경향DB)



그냥 웃고 넘어가는 대신 이제부터 나는 내 옆의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모 아니면 도, 맞거나 틀리거나로 서로를 단죄하고 평가하는 질문이 아니다. ‘생전처음 생각해 본다’는 귀여운 표정을 짓게 만드는, 말 그대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질문 말이다. 정혜윤 PD의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이런 식이다. 남쪽 해안의 어부에게 “가장 좋아하는 물고기가 뭐예요?”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 생선 얼마예요?”를 물어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이리저리 돌려 해석할 필요 없는 날것의 대답을 듣게 될 테다. 누구도 보지 못했을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을 생생히 목격하는 순간을 함께하는 기쁨도 함께.



정지은 | 인천문화재단 직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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