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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만큼 삼성 자본의 ‘무노조 경영’을 상징하는 지표이다. 삼성 자본은 지금까지도 헌법에 위배되는 이 말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를 쓰고 있고, 대다수 국민들이 노동권을 지키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저해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김포의 제일제당 공장에서는 여성노동자 최저생계비 월 4만5000원에 한참 못미치는 월급 2만원을 받으며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노조 설립신고를 마치기 무섭게 이 여성노동자들은 조직폭력배들의 난동과 위원장 해고로 열흘 만에 신고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인정을 요구하는 근로자들의 삼성본관 점거농성 (출처 :경향DB)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노동자들의 노력은 고난으로 가득했지만 끊임없이 지속됐다. 1987년 창원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의 피 터지는 싸움이 있었다. 이후 삼성SDI, 삼성에스원, 삼성전자에서도 이런 움직임은 계속 있어왔다. 그러나 매번 납치와 감금,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탄압, 협박과 회유로 삼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건설과 인간다운 삶의 꿈을 유예시켜왔다.


그러던 중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에서 2011년 7월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복수노조 설립이 가능해지면서 오랫동안 노동조합 설립을 갈망해온 에버랜드의 노동자들이 용기를 갖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역시나 그들에게도 무지막지한 탄압이 이어졌다. 회사 앞에서 노동조합 유인물을 뿌리는 것조차 폭력적으로 저지되는가 하면 각종 소송을 통해 노동자들의 숨통을 죄기도 했고, 달콤한 회유의 유혹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만든 노동자들의 굳은 의지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은 노동조합을 굳건히 지키는 힘이 되고 있다.


이렇게 길을 닦아놓았기에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도 대거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었다. 일군의 삼성 노동자들이 금속노조에 가입해 지회를 설립했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를 갖고 골리앗 자본과 싸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만사가 단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측은 여전히 사용자임을 부정하며 교섭을 회피하고 있고,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해선 표적감사를 동원해 개별적인 탄압을 강화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경북 칠곡센터의 한 젊은 노동자가 출근을 준비하다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하루에 15시간, 많을 땐 주 80시간까지 일해 왔으니 어찌 건강하게 일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아직 바꾸어야 할 것은 많다. 게다가 이런 채찍과 동시에 당근도 내밀고 있는데, 지난 9월30일 사측이 발표한 ‘협력사 상생 지원 방안’이 그것이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등으로 근로시간 위반 문제를 해결하고 각종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다. 그러나 협력사 노동자들을 위해 지원하겠다는 삼성전자서비스 사측의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당당히 교섭에 응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해야 한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노조 출범 (출처 : 경향DB)


얼마 전 수원에서는 의미 있는 시작을 알리는 토론회가 있었다. 세계 초일류 기업을 자처하면서도 무노조 경영, 불산 누출, 백혈병 반도체 공장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고 탄압해온 삼성 재벌의 노동권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애버랜드, 삼성SDI, 삼성중공업, 삼성전자서비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죽어간 백혈병 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온 ‘반올림’ 활동가들이 모여 삼성이라는 골리앗 자본에 맞선 아름다운 싸움의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이 바뀌면 한국이 바뀌고, 한국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오는 12월10일 ‘삼성노동인권지킴이(Samsung Labor Watch)’라는 단체를 공식 출범해 한국과 아시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각종 노동탄압에 대해 다양한 시민들의 사회적 연대망을 구축하고 삼성 계열사와 하청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수십여년 지속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싸움은 기어이 고 이병철 회장의 눈에 흙을 퍼부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용기가 필요하다.


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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