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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거요? 죄송한데 못 갈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벌써 세 명째다. 미안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해맑은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취소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제 놀랍지도 않다. 당장 다음주에 강의가 시작하니 새로 신청받기도 어려운 상황, 40명이 넘는 신청자에 기분이 좋아 ‘강의실이 너무 좁으면 어쩌지’ 걱정한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리스트에는 신청자들이 적어놓은 강의 신청 이유들이 다양하게 적혀 있다. ‘좋은 강의 꼭 듣고 싶습니다’ ‘너무 기대됩니다’ ‘다른 강의도 너무 듣고 싶어요’ 등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는데, 막상 통화를 해보니 아예 자신이 신청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사실 통화하기 전에 문자도 보냈다. 개강 날짜와 시간을 자세히 안내하면서 “혹시 일정이 변경되어 수강이 어려우신 분은 연락을 꼭 부탁드린다”고까지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당황스럽다. 안내 문자를 받고 취소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앞서 개강한 강의에서는 문자로 참석 확인을 부탁했는데, 막상 개강날이 되니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일부러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고 결과는 예상대로 처참한 수준이다. 한두 명 정도야 사정이 생기거나 일정이 바뀌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프로그램마다 이런 사태가 반복되고 있으니 문제다.

일단 강사 선생님께 고백부터 했다. 신청은 40명이 했는데, 확인해보니 20명이 됐다고. 심지어 강의 당일에 전화해서 취소한 사람이 4명이나 된다. 40명을 예상하고 대관해 세팅해놓은 강의실은 여유로울 정도로 자리가 남았다. 선생님은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료 강의는 원래 좀 그래요. 못 온다고 미리 연락하는 분은 그나마 양반이에요. 돈을 낸 게 아니라 절실함도 없고, 꼭 와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없고,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아서 저도 기대치가 낮은 편이에요.” 선생님 말처럼 무료 강의는 일단 신청해놓고, 막상 시작할 때가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오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예 신청 인원의 반만 온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작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못 오고, 프로그램 규모조차 예측하기 어려울뿐더러 수업 진행 방식에도 차질이 생긴다. 공공 영역의 특성상 비용을 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이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무료 프로그램 운영에 대해 고민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뭔가를 배우겠다고 마음과 시간을 내어 신청한 강의조차 이런 상황일진대, 돈을 내고 이용하는 서비스 업종은 더 심각하다. 사실 ‘노쇼(No-Show·예약부도)’ 근절 캠페인이 진행될 때만 해도 레스토랑 같은 일부 업종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쇼’가 꼭 식당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식당과 병원, 미용실, 공연, 고속버스 등의 업체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노쇼’가 초래하는 사회적 손실은 직접 비용만 4조5000억원, 간접 비용까지 포함하면 8조원이 넘는 수준이다. 지난 추석 연휴에 예매된 기차 승차권 역시 40%에 가까운 표가 반환됐고, 5% 가까운 좌석이 빈 채로 남았다고 한다. 광화문광장은 장기간 사용 신청을 내놓고 행사일에 닥쳐서야 취소하는 ‘노쇼’로 골머리를 앓다가, 동일한 행사로 7일 이상은 대관할 수 없게 규칙을 변경했다. 일부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선량하게 이용하는 대다수 사람들마저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노쇼’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정이 생기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의식 그 자체다. 누군가 그 시간에 쓰려던 사람이 자신의 ‘노쇼’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연말이다. 이런저런 모임이나 약속이 많을 수밖에 없고, 당연히 예약도 많은 시기다. 당연한 얘기지만 ‘예약은 약속’이다. 예약이 변경된다면 사전에 연락해 양해를 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당신이 갈지 말지 몰라서 잡아둔 그 자리가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자리였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도 언젠가는 당신도 모르게 ‘노쇼’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못 가면 못 가게 됐다고 미리 연락하는 것, 어렵지 않다.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시간에 전화 한 통, 클릭 한 번으로 기본을 지키는 것. 올 한 해를 보내며 할 수 있는 작지만 꼭 필요한 기본이 아닐까.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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