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직설

아리랑의 마음들

opinionX 2017. 12. 19. 14:16

졸시 ‘디아스포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자 양반, 근데 아리랑이 뭔 뜻인가요? 엊저녁부터 저 말이 머릿속에 딱 붙어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피식) 뭐요, 확실치 않다고요? 그럼 내 처지랑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피식) 그냥 밥이나 먹으렵니다 허, 싱겁네.” 이 시를 쓴 지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7년, 나는 아리랑 컨템퍼러리 시리즈 ‘아리랑X5’에 참여하게 되었다. 명창 이춘희, 현대무용가 안은미, 피아니스트 양방언,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앞선 네 차례 공연의 메가폰을 잡았다. 제목처럼 다섯 가지 새로운 아리랑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기자간담회를 할 때까지는 긴장이 되는 정도였는데, 네 차례 공연을 보고 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각자의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분들도 아리랑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깝다고 느끼는 대상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고 등잔 밑은 늘 어두운 법이다. 

그런데 그분들은 아리랑 고개를 또 한 차례 넘었다. 아리랑 고개의 이편에 있는 나는 이미 저편에 가 계신 그분들이 부러웠다. 게다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관하는 행사이니만큼 부담감도 엄청났다.

10년 전에 쓴 시를 떠올렸다. 당시 아리랑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아리랑의 기원들 중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었다. 나는 흩어진 사람들이자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인 디아스포라와 아리랑을 연결해서 시를 썼었다. 

아리랑의 기원이 분명치 않다고 해서 아리랑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아리랑은 폭넓고 다양하며, 시공간에 따라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마음처럼 말이다.

고심 끝에 공연의 제목을 ‘아리랑의 마음들’로 정했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리랑의 정서를 단순히 ‘슬픔’이나 ‘아픔’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고개를 넘어가는 자의 아리랑과 고개를 넘어가는 자를 바라보는 사람의 아리랑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 

한동안 나는 아리랑에 사로잡혔다. 열여덟 명의 시인들에게 지금―여기의 아리랑에 대해 시를 써달라는 부탁도 드렸다. 먼 데 있는 아리랑을, 아니 우리가 망각해서 멀어진 아리랑을 21세기로 소환하고 싶었다.

열여덟 명의 아리랑이 모두 달랐다. 그것은 아리랑에 대한 열여덟 편의 시들이 아니라, 차라리 열여덟 개의 감정이었다. 마음이었다.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리랑의 무늬와 색깔, 냄새와 질감은 각기 다르다. 아리랑은 거대한 추상이지만, 그것을 파고들면 개개의 간절한 사연이 담긴 ‘나의 아리랑’이 된다. 아리랑이 지닌 힘은 뿜어내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동시에 이뤄지는 데서 나온다. 혼자서 품고 있을 때 마음은 간절하다. 그리고 주고받을 때, 비로소 마음은 ‘해소’될 기회를 얻는다. 음악처럼, 춤처럼, 그리고 시처럼.

행사 당일, 이현승 시인은 아리랑의 마음을 가리켜 배고픔이라고 했다. 안현미 시인은 할머니의 은비녀라고 했다. 시인들이 아리랑을 재해석한 시를 읽고 “제가 생각하는 아리랑의 마음은 ○○○입니다”라고 말할 때 사람들의 가슴에 불씨가 생겼으리라. 고비를 한 고개 한 고개 넘어가기 때문에 마침내 아리랑은 완성될 수 있다는 안은미 선생님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무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아리랑의 마음은 안간힘입니다.” 혼자의 마음이 함께의 마음들이 되기 위해 애쓰는 힘, 혹은 그 반대.

‘아리랑의 마음들’ 공연의 전날과 당일에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겨우겨우 아리랑 고개를 넘어왔는데 뭐 놓고 온 것은 없는지 초조한 마음 때문이었다. 어칠비칠하며 나는 아리랑을 넘었다. 2017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올 한 해 내 앞에 있는 아리랑 고개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돌이켜보니 매해 나는 아리랑을 살고 있었다. 기쁜 날도 있었지만 슬픈 날, 아픈 날이 더욱 생생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웃음은 휘발되지만 울음은 축적된다. 2018년이 온다. 아리랑의 새 마음이 오고 있다.

<오은 | 시인>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