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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고용률은 그 나라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과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서로의 땀방울을 존중하며 연대의 환희를 나눌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은, 그 나라의 이주자, 장애인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혐오와 폭력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서로가 자유롭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국민총생산은, 노인과 젊은이가,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그리고 서로가 평등한 여성과 남성이 한데 어울려 얼마나 신비롭고 장대한 직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결코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부의 수준은, 무엇보다 그 나라의 산과 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푸르며, 어린이들은 그 위를 얼마나 마음껏 뛰놀 수 있는지 하나도 말해주지 못한다.

 

 

한국은 경제수준을 세계 10위 안으로 끌어올렸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서 치명적인 적신호가 켜졌다. 무엇보다 분배구조가 심각한 수준으로 망가져 있다. 자산과 임금 수준이, 협상력과 의사결정권이, 문화를 향유하며 건강하고 사람답게 삶을 영위할 개인들의 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꿈의 크기조차 점점 더 한쪽으로만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지 않아도 상식적인 수준의 분배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오감을 통해 느끼고 있다. 다만, 매일 경험하며 하루하루 무뎌지고 있을 뿐이다. 가난한 노인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폐휴지를 주워야 하고, 많은 노인들이 삶의 끝을 자살로 택하도록 내몰린다. 한국 청년들은, 이미 다 잡아가 버려 좋은 물고기가 없는 바다에서 계속해서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야만 살 수 있다고 주입받는다. 권리에 대한 기억은 이들에게서 서서히 퇴색했고, 젊은 영혼들은 음료공장 현장실습 과정에서 기계에 가슴이 눌려 목숨을 잃기도, 콜센터에서 실습교육 대신 실적 압박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나마 일이 있는 어른들은 긴 근로시간을 버텨내야 한다. 날마다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부부는 아이와 놀아줄 시간도 없다. 출산은 아득하고, 한번쯤 꿈꿔봤던 “행복한 집”에 대한 바람도 완전히 소멸되었다. 부모가 바깥 세계에서 몰고 들어온 불안감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반문 없이 달린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행복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낮고, 청소년의 자살률은 가장 높다.

해고에 대한 불안으로, 좀처럼 오르지 않는 임금에 대한 불만조차 꺼내보지 못하는 노동자가 3명 중 1명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 자원에 대한 통제력과 협상력은 낮아지고 있고, 개별 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은 확대되고 있다. 작아지는 밥그릇 자체에 대한 의문은 없이, 어느새 싸움은 노동 대 자본이 아니라, 불안정 노동자와 ‘좀 더’ 불안정한 노동자 간의 싸움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에서 부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전체 부의 반은 토지, 빌딩과 같은 자산이다. 그리고 자산에서 얻어지는 소득은 노동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난다. 상위 10%가 우리나라 전체 부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는데, 부의 불평등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이다. 한국 아이들의 꿈은 빌딩주인이고, 가장 ‘좋은’ 부모나 배우자가 되려면 자산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망가진 채 성장에 대한 맹목적 허기로 우리는 언제까지 달리기만 할 것인가. 한국의 경제성장은 상식적인 수준의 분배조차 가져오지 못했다. 일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에는 그토록 엄격하면서, 자산으로 인한 불로소득에 어떻게 이토록 관대할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복지정책을 내세웠던 정부도 대대적 조세개혁 대신 핀셋 조세정책만으로 생색내고 있다. 아이들의 보편적 권리로 약속되었던 아동수당마저 결국 선별적 급여로 추락될 조짐이다. 보편적인 복지서비스의 확대는 작은 예산의 일자리 정책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 상상력이다. 이것은 일과 소득의 새로운 관계, 공유자산에 대한 새로운 규칙, 성장과 분배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에게는 영웅적 수장이 아니라,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봄날 걷잡을 수 없이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새싹같이, 깨어있는 시민들 한명 한명의 급진적 상상력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를 압도시킬 만큼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자.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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