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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보내는 시절에는 잘 몰랐다. 사람들이 ‘보통 인간’에게 기대하는 바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을. 그리고 보수적이라는 것을.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이쪽’ 세상이 책에 펼쳐진 ‘저쪽’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가끔 혼자서 놀라고는 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결혼을 했는지, 아이는 몇인지, 연령에 따라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마찬가지이다. 타인들의 질문은 조심스럽지만, 그 조심스러움에는 응당 그러해야 마땅하다는 완강한 의식이 묻어 있다. 그 완강한 의식을 <편의점 인간>은 석기시대부터 지속된 인간의 보수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편의점 인간>은 2016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데, 작가 무라타 사야키는 실제로 18년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편의점을 통해 바라본 인간 사회란 작가에 의하면 석기시대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현대사회니 다양성이니 해도 사냥을 하지 않는 남자,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를 무리는 가만두지 않고 ‘보통 인간’이라는 규격품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을 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풀어가는 시점과 코믹한 문체이다. 화자인 게이코는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기계적 인물인데, 18년을 편의점 알바로 지내오고 있지만 어떤 결핍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서른여섯 살의 게이코의 알바인생을 끊임없이 의아해하고 염려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녀는 그 반복되는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일을 감행한다. 혼활(결혼활동)을 위해 편의점 알바를 하다 쫓겨난 껄렁한 청년을 집 안에 들인 것이다. 연인이 아닌 이들의 동거는 위장에 불과한 것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기뻐하고 우려하면서 그들에게서 하나의 채찍을 거둔다. 동거 소식에 “잘됐다! 난 걱정했어”라는 친구의 반응, 그리고 이어지는 백수 애인에 대한 복잡한 표정과 다른 충고들을 접하면서 게이코는 “다들 내가 비로소 진정한 ‘한패’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는 모두에게 ‘저쪽’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이 무감한 게이코의 시선에 비치는 인간세상의 기묘함은 철저히 ‘이쪽’ 세상에 속하면서 루저의 원한으로 똘똘 뭉친 백수 청년 시라하의 것과 대비되면서 강조되는데,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관점에 의하면 게이코는 그보다 못한 이단자이다. “자신이 부끄럽지 않아요? 알바만 하다가 할망구가 되어 이제 시집갈 데도 없잖아요. 당신 같은 여자는 처녀라도 중고예요. 너저분한. 석기시대라면 자식도 낳을 수 없는 나이 든 여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무리 속을 어정거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무리의 짐일 뿐이죠. 나는 남자니까 아직 만회할 수는 있지만, 후루쿠라씨는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요.”

<편의점 인간>은 일종의 편의점에서 바라본 인간학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편의점의 점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제복을 입고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것. 그 매뉴얼이란 유년, 청년, 중년 등의 시간대별로 할 일이 정해지고, “어서오세요”와 같은 접객용어로 무장한 기능인이다.

어느 평자의 말대로 이 소설은 ‘우습고 귀엽’지만, ‘대담하고 무섭다’. ‘이쪽’의 삶의 밑자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삼포세대, 미혼, 백수 등의 호명도 일종의 편견일 수 있겠다. 주변에는 남녀 구분 없이 결혼을 못해서가 아니라 ‘안’ 하는 이들도 많고, 또 결혼한 부부 중에서도 경제적 이유와 상관없이 아이를 원치 않는 이들도 많다. 그 나름 다른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생의 두꺼운 층이 있을 터인데, ‘보통 사람은 보통이 아닌 인간을 재판하는 게 취미예요’라는 소설의 한 대목처럼 사람들은 대번에 걱정하거나 힐난하곤 한다. 아이를 갖지 않는 젊은이들을 이기적이라고 재단하거나 비혼이나 무직이 당연히 우려할 만한 사태라는 식으로 말이다.

‘저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며 노동을 거부하는 바틀비(<필경사 바틀비>)는 성과사회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아이콘으로 언급되곤 한다. <편의점 인간>의 게이코는 정상의 삶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류의 오랜 보수성과 불화하는, ‘아니요’들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보통 사람의 우려와 비난에는 어쩌면 ‘이쪽’ 세상에서의 고난과 견딤이 의미 없는 것일 수 있다는 불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을 해치지 않는, 각자 추구의 행복을 이쪽 방식과 다르다고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 그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외에 인간이 가꾸고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유토피아가 아닐는지.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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