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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 학기는 매주 목요일 저녁이다. 서울시민대학 권역별 캠퍼스 글쓰기교실. 올해로 4년째로 접어든다. 봄가을 두 학기, 한 기수에 30명 내외가 들어온다. 교과명은 ‘나를 위한 글쓰기-자기 성찰과 재탄생’. 그간 250여명이 거쳐갔다. 총 10주로 진행되는데 개강 첫날에는 강의실이 북적대지만, 2~3주 지나면 앉는 자리가 정해지고 수강생 수도 고정된다.

큰 기대를 품고 왔다가 이내 실망하거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한다. 내 쪽에서는 수강생이 30명이 넘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개강 때 일부러 ‘엄포’를 놓는다. 단단히 각오를 하지 않으면 따라오기 힘든 강력한 프로그램이라고, 한 주에 한나절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글쓰기만 생각해야 한다고, 그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래야 첨삭지도가 가능한 20~30명 수준을 유지한다.

제일 먼저 50대 중년 남성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 다음이 직장에 다니는 30대 남성들. 여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대부분 끝까지 간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성, 특히 중년 이상 남성들에게 자기 삶을 글로 풀어내라는 요청은 거의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글쓰는 행위 자체가 낯설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럴 기회가 있다고 해도 마음 놓고 털어놓을 대상이 없다. 성인 남자들에게는 자기 고백이나 대화(여자들의 수다) 혹은 친밀성을 위한 유전자가 거의 없다. 우리 글쓰기의 목표와 구조,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지나온 자기 삶을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관계를 재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수강생들이 ‘자기 삶 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재정의하는 순간을 ‘두 번째 생일’이라고 명명한다. 주민등록번호에 나와 있는 첫 번째 생일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두 번째 생일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두 번째 생일이 진정한 성년의 날이자 마음이 성년식을 치르는 날이다.

시민대학 첫수업 서울 중구 을지로 옛 미문화원에서 1일 문을 연 서울시민대학에서 수강생들이 첫 수업을 받고 있다._남주환기자

어른이 되지 못하고 생물학적 나이만 먹는 ‘어른아이’가 의외로 많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무지막지한 이유 중 하나가 어른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배타적 소유욕, 지나친 공격성, 과도한 열등감, 지속적인 무기력이 다 여기서 비롯된다. 글쓰기 강의실에서 매번 강조하는 말 중 하나가 ‘홀로 서야 더불어 설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과 만나야 한다. 지나온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자기와 대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고백하자면, 시민대학 글쓰기에 선생은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장소, 잊을 수 없는 음식, 잊을 수 없는 선물과 같은 글쓰기 과제를 내주고, 모둠별로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이 전부다. 가르치기는커녕 내가 몰래 배우는 것이 훨씬 많다. 글쓰기를 자청한 저 중년들이 누구인가. 산업화, 도시화,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역전의 전사’들 아닌가. 저분들이 털어놓는 우여곡절과 신산고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는가. 저 유일무이한 의미들이 우리가 공유해야 할 생의 지혜이자 용기가 아니던가.

잊을 수 없는 수강생이 여럿이다. 매년 봄가을마다 몇 분씩 새로 생겨난다. 글쓰기를 집짓기로 바꾸어 시민들에게 자기가 살 집을 설계하도록 하는 젊은 건축가, 잘나가던 출판사를 때려치우고 한과 장사를 시작한 편집자, 장애우들의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준 화가, 오랜 슬럼프를 딛고 일어나 글쓰기 강사로 나선 작가, 어머니와의 불화를 털고 일어나 열혈 시민기자로 거듭난 젊은 여성, 나이 예순이 넘어 다시 한자 공부를 시작한 칠순 할아버지, 지리산 어귀에서 ‘낮에는 국방군, 밤에는 인민군’ 시절을 겪었던 팔순 할머니, 꿈에 그리던 시인이 된 철학과 대학원생, 마침내 식당에서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를 큰소리로 주문하게 된 중년 남성…. 자기 삶 쓰기를 통해 저마다 두 번째 생일을 갖게 된 분들이다.

또 스승의날이 돌아온다. 2년 전 세월호 사태가 나자 스승의날을 자진 반납한 대학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이번 5월에도 그분들은 부끄러워하고 아파할 것이다. 스승이기를 거부한 대학 선생님들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스승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선생님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승 없는 스승의날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스승이 있다. 그분들은 손사래를 치겠지만, 글쓰기를 통해 저마다 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분들이 나의 스승이다. 그분들의 이야기가 나의 또 다른 사표(師表)다. 두 번째 생일이 없는 삶처럼 무의미한 삶도 없다. 의미 없는 삶이 최악의 삶이다. 누가 말했던가.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고 ‘의미 없음’이라고.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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