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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남보다 일찍 귀가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술자리에서마저 이런 행태가 잦으니 그에 대한 소문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인기 있는 몇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화끈하게 술을 샀을 뿐만 아니라 일일이 택시비도 나눠줬습니다. 다음날 페이스북에는 술자리 참석자들이 그를 칭송하는 글들이 일제히 올라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열심히 ‘좋아요’를 눌러댔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속게 되고,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공격적인 목소리에 시달리고, 모욕당하고, 비방당하는” 일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소통의 도구인 소셜미디어가 “어린 누리꾼들을 고독과 우울증으로 내몬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합니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페이스북이 사회적 두뇌의 축소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 소지도 있다”고까지 말하는 이가 있네요. 지난해 발표한 <디지털 치매>(북로드)의 저자인,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뇌과학자 만프레드 슈피처입니다.
국내 스마트폰 보급대수가 올해 말이면 4300만대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현재 전체 휴대전화 보급대수이기도 합니다. 2010년 4월3일에는 스마트패드가 처음으로 등장해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이제는 이 또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됐습니다. 이제 6월이면 둘의 기능이 하나로 모아진 ‘패블릿’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런 기기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알코올과 니코틴, 각종 불법 마약의 소비는 감소 추세인 반면, 컴퓨터와 인터넷 중독 현상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최근 5년 사이에 게임 중독자는 세 배나 증가했는데 주로 실직 상태의 젊은 남성이라 합니다. 이들의 생활은 디지털 미디어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더구나 기억력 장애와 주의력 결핍 장애, 집중력 장애는 물론 감수성 약화를 겪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질병 양상을 ‘디지털 치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지요. 2007년에 한국의 의사들이 말입니다.
저자는 이 질병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디지털 치매’는 컴퓨터, 스마트폰, 비디오게임, 텔레비전 등의 디지털 미디어와 SNS의 과용으로 기억력과 학습 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져서 사실상의 바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디지털 치매’는 “무엇보다 무능함의 증가로 인해 정신활동을 이용하고 제어하는 능력, 즉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퇴보시킬 것”이며 결국 “삶의 질이 저하되고 조기 사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디지털 미디어의 이용률이 가장 높은 국가인 한국”의 초등생 12%가 이미 인터넷 중독으로 드러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저녁 자리에서 수십 편의 한시를 줄줄 외워 나를 놀라게 한 한문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한시 모두를 할아버지 무릎에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학습을 하면 시냅스, 그러니까 신경세포들 사이의 연결부가 변하고 뇌의 능력은 증대된다고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더욱더요. 치매환자들이 어린 시절은 잘 기억하지만 최근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겠지요. 그러니까 저자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일종의 마약을 투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지당해 보입니다.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어린 나이에 컴퓨터를 이용하면 집중력 장애는 물론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읽기 장애까지 겪을 수 있”으며 “미국과 독일의 연구에서도 확인되듯, 취학 연령의 어린이에게는 사회적 고립이 자주 관찰”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평생 학습의 기본이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의 훌륭한 교육”이라는데 그 훌륭한 교육은 무엇일까요. “인지하기, 생각하기, 체험하기, 느끼기, 행동하기” 등을 통해 기억에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이런 일은 스크린과 마우스가 아닌 종이와 연필로 이뤄져야 효과가 크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는 “디지털 미디어는 실제로 뚱뚱하게, 어리석게, 공격적으로, 외롭게, 아프게 그리고 불행하게 만든다. 어린이들에게는 이용 시간을 제한하라. 이것만이 그나마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린이가 디지털 없이 지내는 하루하루는 선물 받은 시간이나 마찬가지”라고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간절하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스마트 교육 추진전략’에 따라 2015년까지 모든 초·중·고 교과의 종이 교과서가 디지털 교과서로 바뀔 전망이다. (경향DB)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는 2015년부터 모든 취학 아동들에게 태블릿 PC를 지급하고 전자교과서로 수업할 계획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계획은 학교 현장의 교사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와 실행이 다소 늦춰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하루빨리 취소되어야 마땅합니다.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을 통해 은밀하게 국민들의 치매를 꾀함으로써 국민들을 손쉽게 통치하려 한다는 사악한 음모론”에서 벗어나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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