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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선배인 한 고등학교 교사를 30년 만에 만났습니다. 도덕 교사인 그는 이제 퇴직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2011년부터 초·중·고교에 적용된, 사회 과목 수업 등을 특정 학기 또는 학년에 몰아서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집중이수제’로 말미암아 도덕 과목의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답니다. 정년을 몇 년 앞둔 나이에 이 학교 저 학교 떠돌아다니며 수업을 해가면서까지 버티고 싶지 않다는군요.
그는 2006년부터 초·중·고교에서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시간에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교육체제인 ‘방과후학교’도 비판했습니다. 방과후학교가 사교육비를 경감하고 양극화에 따른 교육격차를 완화하겠다는 취지대로 운영된 것은 첫해뿐이었답니다. 다음해부터는 영어와 수학 등 주요 과목의 보충수업으로 변질되었답니다. 그는 대학 진학을 위해 영어, 수학의 시간을 늘리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적어도 서양철학의 중요한 사상가나 한국사상의 주요 개념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개탄했습니다. 예술 과목 또한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더군요. 이같은 정책이야말로 탁상행정의 본보기이지만 바뀔 것 같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서울 시내 한 여고에서 방과후 수업을 하고 있다. (경향DB)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 머릿속에는 최근 출판시장의 ‘소프트 인문학’ 붐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은 6개월 만에 10만부 이상 팔리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저자인 주현성씨는 평범한 출판기획자입니다. 그가 심리학·회화·신화·역사·철학·글로벌 이슈 등 인문학 전반에 걸쳐 각 분야의 큰 줄기를 잡아 그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요약 정리한 이 책은 전문가적 식견보다는 편집적 안목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이제 ‘CEO 인문학’ ‘청소년 인문학’ ‘어린이 인문학’ ‘부모 인문학’ 등 인문학 독자의 대상은 전 세대로 확산되고 있으며, 사진·미술관·돈·숲·일상 등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붙는 책의 영역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요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인문학 강좌를 듣는 사람의 90%가 주부랍니다. 지금의 인문학 붐은 여성·지방대 출신·백수·노숙인·저소득자 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시민들에게 힘입은 바가 큰데, 이 열풍을 가장 열성적으로 주도하는 ‘공부하는 주부’를 줄인 ‘공주’가 뜨고 있다고 말한다는군요. 인문학 붐은 고전 열풍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영화 개봉에 힘입어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 여러 권이 일제히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부와 지위에 집착하는 신기루 같은 세상에서 과거의 사랑을 되찾으려다 배신당해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개츠비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5년의 징역형을 받고 탈옥을 시도하다 다시 14년의 형을 더 받은 장발장이 등장하는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과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던 안나가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던지고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격렬한 사랑에 빠지는 <안나 까레리나>(톨스토이)의 인기를 이어받은 것이지요. 세 소설의 캐릭터가 강한 주인공들은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격렬한 욕망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출판시장에는 ‘셀프힐링’ 바람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오죽하면 출판시장의 유일한 트렌드가 ‘셀프힐링’이었다고 말했을까요? 셀프힐링의 대표적 사례가 ‘버킷리스트’ 실천하기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힘들어도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일에만 집착할 수는 없지 않나요? 산목숨들이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하면서 어떻게든 일어서려는 움직임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스탠딩’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스탠딩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문학·역사·철학 등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기반지식’인 인문학은 삶의 길을 터줍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위한 정거장으로 전락한 고등학교나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의 정거장으로 추락한 대학에서는 이런 인문학이 소외된 지 오래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세파에 지친 밑바닥 인생들이 스탠딩하려다보니 인문학 붐이 점차 거세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11년 말 한 언론사의 정치부장은 <운명>을 썼다는 문재인의 서재에 초청받아 가보았는데 신간은 거의 보이지 않고 1970~1980년대의 책만 가득 차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그 사실이 표면에 드러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더군요. 박근혜 후보의 집에는 아예 서재 자체가 없다는 사실만이 잠시 알려지기는 했지만요.
박근혜 대통령은 5월15일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른바 ‘윤창중 스캔들’과 관련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환기시키며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인재도 인연을 만나야 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제나라 환공처럼 밤새 불 밝혀놓고 인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정료지광(庭燎之光)’의 지혜를 박 대통령에게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그 전에 젊은이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학교에서 기반지식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신다면 더 이상 여한이 없겠습니다.
"허리를 툭 한번 친것뿐" (경향DB)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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