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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덕! 보통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다. 2009년 9월18일 지리산의 주봉 천왕봉에는 낯선 풍경이 연출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91세의 이병덕 할아버지를 포함한 다섯 명으로 구성된 노인 등정대가 천왕봉 정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복 차림에 나무 지팡이를 짚고 정상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신선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죽기 전에 지리산 천왕봉 한번 가보자!” 젊은이들마저 헉헉거리게 만드는 천왕봉 등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노인 등정대는 아홉 시간의 사투 끝에 정상에 섰던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천왕봉에 등정하려는 우리 할아버지들의 의지에는 ‘스스로의 걸음으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할아버지들은 스스로의 걸음으로 천왕봉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아들과 손주 등에 업혀 천왕봉에 오를 수도 있었다. 혹은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가볍게 착륙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건 ‘스스로의 걸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다른 것에 의지하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는 제대로 된 희열이 발생할 수는 없다. 자신의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야만 한다. 자기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마침내 정상에 이를 때에만 우리 내면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로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는 법이니까.

우리 할아버지들뿐만 아니라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말하지 않고도 안다. 정상에 오른 희열은 사실 겉모습일 뿐, 진정한 희열은 자신을 극복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정복의 대상은 항상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지리산 근처 함양 출신이지만 나는 설악산을 사랑한다. 설악산이 지리산보다 나를 훨씬 더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려면 새벽 일찍 탐방로가 열리자마자 오색 약수터를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 정말 동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출을 제대로 맞이하려면, 가파른 등산로를 오를 때 쉴 생각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해가 뜨기 직전 대청봉에 올랐던 적이 있는가. 그곳에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동해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적이 있는가. 아직도 나는 서서히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는 태양을 보았던 대청봉에서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대청봉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스스로의 걸음으로’ 대청봉에 이른 사람들, 방금 떠오르고 있는 태양빛에 구릿빛을 띠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설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설악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설악산은 동해 바다의 일출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도 아니다. 차라리 설악산은 구도의 장소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살이에 대한 일체의 고뇌도 가파른 설악산은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거칠게 호흡할 때, 고뇌가 우리를 지배할 여력도 우리를 좌지우지할 여지도 없으니까. 그래서 설악산은 좌절과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기꺼이 구원해줄 것이다. 그러나 설악산은 우리 마음만 다스려주는 것이 아니다. 설악산은 우리 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기도 한다. 대청봉에 오르는 시간이 길어지거나 혹은 도중에 더 많이 쉬게 되었을 때, 우리는 허허로운 마음으로 자신이 약해졌거나 혹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악산에 오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진리에 이르려는 구도자의 치열한 수행을 닮아 있다. 자신과 직면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구도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대청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광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청봉에 펼쳐진 아찔한 설악산의 장관과 멀리 보이는 일망무제의 동해는 지금까지 치열했던 구도행위의 완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청봉의 풍광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풍광에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이기고 떼었던 발걸음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청봉에 올랐던 사람들이 풍광이 너무나 근사하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헬리콥터나 다른 수단으로 별다른 노력도 없이 대청봉에 올라서는 결코 그 풍광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 “양양 오색에 케이블카 설치 추진


설악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후손 ‘산행의 희열’ 잃을까 두렵다”

 

지금 설악산에는 케이블카가 있기는 하다. 권금성에까지 이르는 케이블카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설악산의 진정한 묘미를 아는 사람들, 아니 산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권금성 근처를 아예 피하고 있다. ‘스스로의 걸음’이 아니라면 산에 오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에 산행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쉽게 오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에 직면하기 어려운 법이다. 산의 가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급적 힘든 코스로 산에 오르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건 그만큼 아무런 도움이 없이 고독하게 자신에 직면하려는 열망 때문은 아닐는지.

 

나 이외에도 설악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지금 양양 오색에서 시도되고 있는 케이블카 설치 소식 때문이다. 이미 대청봉에 오르며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우리들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느꼈던 희열을 더 이상 후손들이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권금성으로 가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대청봉에 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케이블카 설치가 환경을 훼손하는지, 아니면 환경을 보호하는지 여부를 두고 다양한 논의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설악산, 혹은 등산이 가진 인문학적 가치를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설악산을 돈 몇 푼으로 쉽게 살 수 있는 매춘부로 만들지 말자. 우리의 엄청난 구애행위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도도한 여신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를 위해서나 후손들을 위해서 말이다.

 

갑자기 가수 양희은이 불러 유명한 ‘한계령’이란 노래 선율이 떠오른다. 허허롭게 대청봉에 내려올 때,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네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앞으로 이 노래를 지금처럼 부를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병덕 할아버지는 지금 설악산을 필두로 지리산과 같은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아이고. 진작 케이블카가 있었으면 천왕봉 오르는 것이 그만큼 쉬웠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산은 스스로 올라야 맛이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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