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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잘 아는 것과 무엇인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쉽게 확인되는 일 아닌가. 노골적으로 물어볼까. 지금 당신의 배우자에 대해 아는 것을 연애 시절에도 알았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결혼했겠는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법이다. 사람에 대해서만 그럴까. 아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는 누구보다 게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산이나 등산 장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포괄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프카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시시콜콜한 삶에도 정통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는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도 몇 번이고 방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자.


다양한 게임과 그것의 작동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게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단순히 게임 업체에 다니고 있기에 그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등산 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은 등산 장비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가 산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그는 생계를 위해 등산 장비 사용법을 숙지해두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 생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카프카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독문과 교수로서 강의를 위해 카프카를 요령껏 정리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얻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잘 알게 된다는 교훈이다.


(경향DB)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병폐는 앎과 사랑 사이의 관계를 거꾸로 알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학을 예로 들어볼까. 선행학습이든 뭐든 수학을 열심히 가르쳐서 그걸 잘 하게 되면 아이들이 수학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 아이는 나중에 수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되어 괴델과 같은 경천동지할 공리를 발견하는 학자로 자랄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오직 수학과 그것이 열어놓은 수적 세계를 사랑하는 학생만이 제2의 괴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교육은 아이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는 것으로 시작되어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만일 아이들이 사랑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알아갈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찾는 순간, 아이들은 제2의 괴델도, 제2의 맥스웰도, 제2의 글렌 굴드도, 제2의 카프카, 그러니까 독창적인 지성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한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좋은 부모를 만났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부모는 아이가 사랑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옆에서 끈덕지게 지켜봐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학 때처럼 여유가 있을 때, 아이는 다양한 곳과 다양한 것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름방학 때 이 가족이 지리산에 올라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를 보고 아이는 우주에 매료됐던 것이다. 마침내 아이는 사랑하는 것을 찾은 것이다. 이후 아이는 천체 망원경도 사고, 인터넷에서 자료도 검색하고, 가끔은 어려운 천문학 책도 구해 끙끙거리며 보게 될 것이다. 당연히 이 아이의 전공은 천문학이 될 것이다. 별을 그리고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가 어떻게 천문학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침내 그는 대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게 됐다. 첫 강의에서 그는 무슨 말로 자신의 입을 뗐을까. “여러분! 은하수를 본 적이 있나요? 멋지죠.” 


다른 아이가 한 명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회가 변해 천문학을 공부해야 대기업에도 다니고 고위 공무원이 되는 시대에 그 아이가 살고 있다고 하자. 아마 부모들은 아이의 출세를 위해 천문학을 공부시키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선행학습도 시키고, 대학에서 개최한 천문학 캠프에도 아이를 데리고 가며, 부모로서의 열정을 활활 불태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아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부모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인지, 이 아이도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마침내 대학 교단에 서게 됐다. 강의를 시작할 때 그의 첫마디는 무엇일까. “여러분! 첫 페이지를 넘겨보세요. 거기에 우리가 한 학기 동안 다룰 전반적인 내용이 요약돼 있습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창조경제·창의인재 ‘구호’ 아래

온통 분주한 교육계의 헛발질…

독창적 지성인을 키우는 유일한 길은

아이가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것”


별을 사랑했던 첫 번째 교수와 천문학에 정통한 두 번째 교수 중 누가 새로운 별을 발견할 것인가. 누가 우주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인가. 당연히 첫 번째 교수일 것이다. 그는 천문학자가 목적이 아니고, 교수 직위도 목적이 아니다. 그는 별과 우주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그는 시간만 나면 천체 망원경으로 우주와 그 속에 펼쳐진 별들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어떻게 새로운 별을 발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우주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이 나온다면, 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제든지 새로운 별과 관련된 그의 글들은 독창적인 논문으로 학술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교수는 어떨까. 그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업적에 맞추기 위해 논문을 쓰고 학술지에 투고할 것이다. 물론 논문을 쓸 때, 그는 첫 번째 교수의 독창적인 논문을 인용하게 될 것이다.


창조경제니, 창의인재니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는 정권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교육계가 분주하다. 교육 과정에 새로운, 그래서 독창적으로 보이는 교과목을 둔다고 해서 독창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전공들을 가로지르는 융합 교육이 강화돼야 독창적인 지성인이 자라는 것도 아니다. 이건 모두 완전히 헛발질이다. 돌아보라. 지금은 대학의 붕괴가 중·고등학교의 붕괴로, 그리고 이어서 초등학교의 붕괴로 이어지는 시대다. 고등학교까지는 다양한 과목들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성적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한 아이의 적성을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과연 지금 우리 중·고등학교는 아이가 평생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진단평가 보는 초등학생들 (경향DB)


중·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과 대학원은 이제 사랑하는 한 가지 것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지만, 천문학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학문을 돌볼 틈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전공이다. 이제 마음 놓고 천문학을, 문학을, 물리학을, 그리고 사회학을 사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2, 3개나 복수전공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융합형 인재를 키우려고 그러는 것인가. 모두가 헛소리일 뿐이다. 자본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것, 이것이 바로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앞 세대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다. 명심하자. 독창성은 사랑이란 척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이들이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찾도록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만일 찾았다면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독창적인 지성인들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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