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아름다운 말(馬)이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에 몇 개월 체류한 적이 있다. 내가 머문 곳은 카파도키아의 관문인 카이세리라는 도시로, 지척에 높이 3000m가 넘는 에레지예스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카파도키아의 괴암 동굴군(群)은 아득한 옛날 이 에레지예스산의 용암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형상들이다. 누리 빌제 세이란 감독의 최근작 <윈터 슬립>은 바로 이곳, 아나톨리아 고원의 카파도키아를 무대로 펼쳐진다.

터키 영화라면, 아주 오래전에 본 <욜>과 터키 체류 중에 구해 본 <허니> 정도가 떠오른다.

‘인생의 항로’라는 뜻의 <욜>은 터키 감옥을 출소한 여섯 명의 귀향담을 배경으로 국가의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과 압제 상황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그해 칸 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허니>는 <욜> 이후 내 시야에서 사라졌던 터키 영화의 실체를 오랜만에 환기시켜주었다. <욜>이 터키의 현대사를 거느리고 있다면, <허니>는 여섯 살 말더듬이 소년 유수프를 통해 터키의 다양한 자연경관 중 숲의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영화 <윈터슬립> (출처 : 경향DB)


이번에 개봉한 <윈터 슬립>은 지난해 칸 영화제 대상작으로, 왕년의 배우이자 작가인 아이딘이라는 중년 사내가 주인공이다. 그는 카파도키아의 동굴 마을에 ‘오셀로’라는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부동산 임대업도 하는 아이딘은 자신을 부유하지만 양심적인 지성인으로 생각한다. 영화는 주변 인물들의 반감과 불신을 통해 그의 신념과 삶이 허위의식으로 무장한 겨울잠의 막막한 세계임을 드러낸다. 세입자 가족의 어린 소년은 그가 타고 가는 차에 돌을 던지고, 이혼 후 돌아와 얹혀사는 누이는 매번 그의 심기를 거스르며 언쟁을 야기하고, 젊은 아내는 그와 대화 단절 상태이다.

<윈터 슬립>은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가 연극과 영화, 문학과 윤리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장 3시간 반 동안 이어진다. 그런데 경이롭게도, 한 장면도 놓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몰입도가 높다. 인상적인 메타포들 중에서 유독 뇌리에 남는 장면이 있다. 소년의 돌팔매질 사건 이후, 아이딘은 말 장수에게 잘생긴 하얀 말을 사와서는 어두운 동굴에 가두어 놓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혼자 가서 들여다본다. 어느 날 그는 그 하얀 말을 풀어주고, 말은 바위투성이 길을 뒤뚱이며 서툴게 달려간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어둠 속에 머물렀다. 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던 아이딘의 잔영이 쉬이 떠나가지 않았다. 그곳 카파도키아는 ‘아름다운 말이 있는 곳’이 아닌가.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어렵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윤리학> 마지막 문장이다. 지금 우리는 아이딘이 처했던 윈터 슬립과 버금가는 서머 슬립의 기로에 서 있다. 불안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잠식하기 전에, 여름잠이 우리 사회를 깡그리 마비시키기 전에, 들끓고 있는 불신의 고리를 끊고 단호히 새로운 시간을 열어야 할 때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지난 칼럼===== > 함정임의 세상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톨스토이의 무덤에서  (0) 2015.06.30
유월을 떠나보내며  (0) 2015.06.23
성난 눈으로 돌아보다  (0) 2015.06.09
경주, 월정교에 이르다  (0) 2015.06.02
달맞이 언덕의 단상  (0) 2015.05.26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