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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때인가, 전공 수업 시간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강독했다. 사르트르의 <벽> <구토>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내 서가에는 그때 수업시간에 공부했던 원서들이 그대로 꽂혀 있다. <페스트>는 전염병으로 고립에 처한 오랑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극한 상황 속의 인간을 탐구한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사 베르나르 리유. 그는 페스트라는 공포 속에 놓인 인간들을 기록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페스트보다 더 인간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적(敵)과 맞닥뜨린다. 봉쇄된 오랑 시에 급속도로 퍼져가는 불신과 절망, 체념과 고독이 그것이다.

3학년 외국소설 수업 시간에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문청들과 읽곤 한다. 이 소설 역시 콜레라라는 전염병을 매개로 전개된다.

그러나 토마스 만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카뮈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아드리아 해의 깊숙한 내안(內岸)에 자리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동시에 콜레라가 창궐했던 불온한 도시로 악명이 높다. 카뮈가 <페스트>(1947)에서 파헤치고자 한 것은 집단적인 공포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반항이라는 실존 정신이다.

이에 비해 토마스 만이 <베네치아에서 죽다>(1912)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인간 본성에 감춰진 에로스, 곧 절대미를 향한 동경이다. 카뮈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해변의 평범한 도시 오랑에 의사 리유를 등장시켜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해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반면 토마스 만은 베네치아의 역사지리적 속성을 소설 속에 끌어들여 쉰 살의 소설가 아센 바하가 열네 살 미소년 타치오의 아름다움에 빠져 섬을 떠나지 못한 채 콜레라로 죽어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파멸 과정을 연출한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7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공용브리핑룸에서 '중앙 정부와 지자체 간 메르스 총력 대응을 위한 협력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있다. _ 연합뉴스


2000년대 한국 소설에서 디스토피아 서사의 선구작인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2005)은 2002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의 소설적 보고(報告)이자 응전(應戰)이다.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소설의 화두는 인간이다. 인간은 국가라는 사회구성체의 일원이다. 지금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공포의 주범은 무엇인가. 카뮈가 <페스트>에서 문제 삼은 것은 신이 사라진 시대의 성자(聖者)의 존재, 인간의 속성과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의식, 곧 모럴(윤리)이다. 이들을 통해 카뮈가 증명해 보이려고 한 실존의 키워드는 반항과 부조리이다.

부조리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엄연히 존재하나 마비되어버린 체제의 무능과 악화가 일으킨 총체적 난국은 <페스트>나 <아오이 가든>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성난 눈으로 돌아보게 한다.

메르스 이후, 어떤 소설이 우리 삶의 부조리한 치부를 드러내 보여줄 것인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라면, 아픈 눈으로 새겨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이런 상황은, 제발 이번으로 족하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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