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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串)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갑(岬)이라는 말도 좋다. 포구(浦口)나 만(灣)도 좋다. 글자의 모양새와 어감이 근사하다. 프랑스어에서처럼 이들에게 성(性)을 붙여 읽으면, 지형적인 본성을 실감할 수 있다. 본성은 자연이다. 곶은 남성, 포구는 여성이다.

대학 불문과 시절,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유행했다. 축제 때 과가(科歌)로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온종일 책상에 들러붙어 앉아 불어 문장을 해독하느라 끙끙대다가 파란 하늘 아래 이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왠지 모르게 간절해졌다. 노래대로라면 배는 남성명사, 항구는 여성명사여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 항구는 남성이다. 가사의 뜻에 따르자면, 여성인 포구가 적합하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의 뜻을 새기고 부를 때, 인간사 사랑의 섭리에 절로 공감하는 것처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역시 작가가 부려놓은 어휘의 본성을 파악하고 읽으면 공명의 폭이 커진다. 주인공 사내 뫼르소가 어미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마리라는 여자와 정사를 치르고 바다로 간 이유. 마리와 바다에서 물놀이하다가 급기야 바닷속으로 들어가 수영을 하는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프랑스어에서 바다와 어머니는 ‘메르’, 발음이 같다.

나는 해운대 바닷가 달맞이 언덕에 산다. 언덕의 오솔길과 포구를 걸으면서 심수봉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카뮈의 반항 정신에 이끌리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걷는 길은 이름 그대로 달맞이 명소이다.

해운대 십오굽이 달맞이길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을 출발해 송정해수욕장 입구까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관광테마도로 십오굽이 달맞이길. _ 연합뉴스


동해에는 이곳 말고도 휘영청 달이 떠오르는 순간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들이 많다. 곶이나 갑, 언덕들이 그들이다. 장기곶, 간절곶이 떠오른다. 해운대의 달맞이 언덕과 그들은 무엇이 다를까.

알프스 산자락의 남쪽과 지중해 북쪽이 만나 펼쳐지는 곶과 포구의 해안선은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자자하다. 코트다쥐르, 곧 쪽빛 해안이라 불리는 이곳은, 니스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망통, 프랑스령 모나코, 서쪽으로는 앙티브, 생폴드방스, 칸, 생트로페 일대를 가리킨다. 이십여년간 나는 세상의 크고 작은 바다들을 경험했다. 코트다쥐르처럼 절경을 이루는 해안은 많았다. 그럼에도 여행자들이 코트다쥐르를 꿈꾸는 이유는, 르누아르, 피카소, 샤갈, 피츠제럴드 등 무수한 예술가들이 그곳을 거처로 삼고, 쓰고, 그리고, 찍으면서 독보적으로 예술적인 이미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해운대 달맞이 언덕은 문탠로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바닷가 오솔길을 걸으면, 살갗에서 영혼 깊숙이까지 달빛이 깃든다는 의미이다. 해운대의 달맞이 언덕이 세상의 무수한 달맞이 언덕들로부터 문탠로드라는 고유한 이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지형적인 본성에 예술적인 힘이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코트다쥐르처럼.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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