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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수도 피렌체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은 붉은 돔의 두오모가 도심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도시 한편을 에돌아 아르노 강이 흐르고, 그 위에 베키오 다리가 놓여 운치를 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예술의 수도 파리가 도시 미학의 진면목을 발휘하는 것은 왕의 궁이든, 시민의 아파트든 6층으로 제한된 건축물 위로 324m 높이의 에펠탑이 파란 하늘 아래 날렵하게 서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도심을 둘로 가르며 센 강이 흐르고, 그 위에 퐁뇌프나 미라보 다리가 놓여 사랑과 예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실어 나르고 있기 때문이다.

피렌체, 파리, 프라하와 같은 세계적인 고도(古都)들은 저마다의 강과 그에 걸맞은 다리들을 거느리고 있다.

고도가 아니더라도 도시를 상징하는 다리의 예는 얼마든지 많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브루클린 다리는 바늘 끝처럼 하늘로 치솟은 마천루의 도시 뉴욕의 숨막히는 시야를 바다로 확장시키며 철골 현수교의 현대적인 디자인을 뽐낸다. 베키오 다리나 퐁뇌프처럼 이 브루클린 다리 역시 수많은 소설과 영화, 그림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주말, 문청들과 경주에 갔다가 경주역에서 걷기 시작해서, 대릉원과 월성, 계림과 교동에 이르렀다. 경주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머물다 오는 곳이다. 이번 경주행은 문청들과의 동행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나는 그들과 교동 향교 뜰에 잠시 앉았다가 냇가로 이끌었다가, 오릉을 지나 삼릉까지 내처 걸어갈 생각이었다. 거기 솔숲에 돗자리를 깔고 각자가 써온 소설을 내놓고 읽을 참이었다.


경주시 월정교 (출처 : 경향DB)


날이 흐려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최부잣집 고택들을 지나 냇가 쪽으로 향했다. 요석궁 앞을 지나자마자 문청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월성 자락 문천(蚊川) 위에 세워진 월정교(月淨橋)였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본채의 형상만으로도 미려한 자태가 압도적이었다. 나는 지난봄부터 매달 공사 중인 월정교를 찾았다. 길이 66m, 폭과 높이가 각각 9m, 기와지붕이 덮인 옛 교량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러 건너다녔다는 다리다. 7~8세기경에 있다가 사라졌던 것을 복원하고 있으니, 이 다리야말로 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피렌체, 프라하, 파리 등 유럽의 고도들이 자랑하는 베키오 다리(14세기), 카를 다리(14세기), 퐁뇌프(15세기)보다 수백년은 앞서 세워졌고, 공학적인 측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선진적이고 세련된 중층 구조였다. 어서 다리가 완성되어 두 발로 직접 걸어서 건너고 싶었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내게는 희열이었다.

무궁화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밤, 열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청춘 시절부터 찾아다녔던 세상의 아름다운 다리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베키오, 퐁뇌프, 브루클린 다리의 형상들 속에 낮에 문청들이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월정교의 자태가 어른거렸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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