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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저는 지방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이동거리가 길어서 힘들었지만 무척 뿌듯했습니다. 주로 40~50대의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제 강의를 열심히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60~70대의 남성들도 다수 참여해 열심히 들어주시는 모습에 당혹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강연투어에서 저는 한 지방 명문사립고에서 성적이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스카이’에 원서 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는 이야기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비싼 돈을 들여 서울 유학을 해도 취업도 되지 않는 마당에 무리할 필요 없이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진학해 부모의 부담이라도 덜어주겠다고 했다더군요. 가족들과 하루라도 더 같이 지내며 함께 책을 읽어보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하더군요.

2010년 3월에 창간되어 6년째에 접어든 월간지 ‘학교도서관저널’의 발행인인 저는 지난해 9월부터 성인들의 독서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펴냈습니다.

<이젠, 함께 읽기다> <책으로 다시 살다> <서평 글쓰기 특강> <문학은 노래다> <은퇴자의 공부법> <당신은 가고 나는 여기> 등은 오로지 함께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들입니다. 이 책들의 기획자들은 독서공동체를 지향하는 숭례문학당의 참여자들입니다.

요즘 숭례문학당의 학인들도 무척 바쁩니다. <서평 글쓰기 특강>의 공동저자인 김민영씨는 지난 토요일에 부산 영광도서에서 강연을 하고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는 소감을 전해 왔습니다. 대전과 김천에서도 독자들이 달려와서 자리를 꽉 채웠다더군요. 책을 읽고 나서 정리가 안된다고 하소연하는 학생들에게 아무 조언도 할 수 없어 갑갑했다던 한 교사는 이런 강의를 아이들에게 직접 들려주어야 한다며 좋아했다더군요.




저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성적지상주의’라는 견고한 성에 이제 본격적으로 균열을 내는 일이 확산되는 것 같아 무척 기뻤습니다. 함께 책을 읽으며 스스로 밝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점차 늘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독서운동을 하는 몇 분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그들도 우리 사회에 책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심지어 “도서관이 중심이 아닌 학교는 학교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도 계신다더군요.

우리 사회에 균열을 내는 일은 또 있습니다. JTBC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송곳>입니다. “어쨌든 나는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다”는 푸르미마트 일동점 과장 이수인과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고 말하는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이 연대해 벌이는 노동쟁의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여러분 곁에 노동조합이 있습니다.” “일 시킬 땐 가족이고 내쫓을 땐 가축이냐” “우리가 쉬워보이지?” “내 목 굵다 잘라봐라” “과장은 접대받고 주임은 징계받고”라는 팻말을 들고 노동자들이 시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막장 드라마 일색인 현실에서 이젠 이런 드라마라야 장사가 될 만큼 우리 현실이 험악해진 것은 아닐까요?

드라마 덕분에 저는 책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여기나 저기나 어차피 최저임금인데 잘린다고 아쉬울” 것이 없는 한국에서 취업을 해도 평생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이들이 주인공들입니다.

“여기서 더 졸라매면 한강 다리 가려고 해도 차비가 없어서 걸어가다 굶어죽을 판인데 당신들 힘든 건 당신들이 못나서 그렇다. 왜 더 졸라매지 않느냐”는 핀잔만 듣는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를 내쫓아내고 그 자리에 계약직이나 외주업체서 보내온 파견직을 꽂아 알량한 비용절감을 시도하는 회사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꼭지만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마음대로 쓰다가 아무 때나 갖다버릴 수 있는 이 좋은 세상”을 사용자들이 스스로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조직의 부조리에도 두려움에 떨며 노예처럼 비굴하게 충성만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한 해고노동자가 “지는 것은 안 무서워요. 졌을 때 혼자 있는 게 무섭지”라고 내뱉는 대사에서 이 시대 두려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3포세대’가 ‘9포세대’로 진화하더니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다 해서 ‘N포세대’로 불립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자살해서 부잣집에서 다시 태어나는 편이 낫다는 자조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50대 이상의 부모들은 세상살이에 지칠 대로 지쳐 보따리를 싸서 다시 들어오는 ‘캥거루족’ 자식들 때문에 지쳐갑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부모세대’의 일자리를 줄여 ‘자식세대’의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며 세대갈등만 조장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구 소장은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인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라고 희망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송곳 같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균열이 매우 필요한 때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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