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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내년부터 학교 현장에서 고전 읽기를 강화하는 인문소양교육에 중점을 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지난 6월 초 열린 교육부 주최의 ‘전국 초·중등 인문소양교육 포럼’에서 ‘대중 인문학과 대학 인문학’에 대해 발표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발표자는 요즘 교사들의 중·고등학교 때 성적이 너무 좋은 것이 문제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정년이 보장되는 교사라는 직업이 인기를 끌다 보니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교사들이 학창시절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사들이 교실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만 챙기고 있는 것이야말로 문제라는 지적을 하면서 성적만으로 교사를 뽑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일제고사를 도입했습니다. 단순히 학업성취도를 측정한다고 했지만 모든 학생을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제도였습니다. 학교평가와 연계하다 보니 교사가 성적을 조작하는 일마저 발생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산업화 시대라면 이런 제도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양질의 교육을 통해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속도와 효율의 교육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교육의 기본은 읽기 능력의 배양일 것입니다. 책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과서는 “인류문화의 정수를 모아놓은 표준지식”을 단순히 알려주며 암기시키기보다 “다양한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더 깊은 지식 습득의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정한 이념을 주입하려는 의도를 버리고 가치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교과서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진취적으로 생각하면 지식의 양이 3일 만에 2배로 증가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지식기반사회에서 교과서가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우리나라도 이제는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교과서 자유발행제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뜻이 있는 모든 출판사가 자유롭게 교과서를 발행하고 학교에서는 무수한 교과서 중에서 자유롭게 골라 적절한 수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일제고사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내년부터 전국의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가 전면 시행됩니다. 교육부의 설명에 따르면 자유학기제란 “중학교 수준에서 한 학기 동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등 시험부담에서 벗어나 토론과 실습 등 직접 참여하는 수업을 받고 꿈과 끼를 찾는 다양한 체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자유학기제는 진일보한 제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도를 도입한 교육부가 어이없게도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한다는 자가당착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다양하게 출간되는 교양서를 함께 읽고 토론하며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정해 가야 할 것입니다. 2013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빅히스토리’ 시리즈(전 20권, 와이스쿨)는 “우주·생명·인류 문명, 그 모든 것의 역사”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이명현), <생명은 왜 성을 진화시켰을까>(장대익), <세계는 어떻게 연결시켰을까>(조지형) 등 세 권으로 출발한 책이 어느덧 12권이나 나왔습니다.
저자들은 ‘빅히스토리’가 아닌 ‘빅퀘스천(Big Questions)’이라 해야 옳다고 말합니다. 나(개인), 가족, 민족, 세계, 인류로 점차 관심을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면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과 나라는 존재가 나아갈 바를 저절로 찾아낼 것입니다. ‘전체적인 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읽고 토론하기 좋은 교양서가 꾸준히 출간되고 있습니다. <철의 시대>(강창훈, 창비)는 철과 함께한 인류 4000년의 역사를 매우 압축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철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철이라는 임팩트가 강한 ‘앵글’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비추어 보고 철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0억년 전에 탄생한 철은 단짝 친구인 산소와 만나 산화철이 되었습니다. “산화철은 물과 분리되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바다를 표류하던 철은 산소를 만나서야 정착에 성공합니다. 철을 산화하고도 남은 산소는 오존(O3)을 만들어 냈고, 오존층이 형성되어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을 차단했습니다. 생명체가 더 이상 바다에 갇혀 살 필요가 없어지면서 육상 생물이 출현하게 됐지요.” <철의 시대>는 이렇게 우주 공간에서 철이 처음 생성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해 철이 인류의 문명과 일상생활을 장악하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학교교육은 권력을 가진 자의 특정 이념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양서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꿈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 교육이 교양서에 완전히 의존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의 다양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육부가 올바른 방향만 설정해준다면 정말 다양한 책들이 빠른 시간 안에 출간될 것입니다.
교육부가 허튼 교과서에 투입할 예산을 이런 방향 설정에 서둘러 전환해 투입하시기를 간절하게 권고하는 바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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