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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된 국민의사에 반하는 대통령의 아집으로 나라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면은 혼미하나 민의는 하나다. 남녀와 세대와 지역과 이념을 뛰어넘어 6월항쟁 이후 지금처럼 압도적인 국민통합과 단일의사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최고위급 인물들이 줄줄이 소환·구속되는 데서 볼 수 있듯 청와대는 이미 부패의 핵심이자 범죄소굴이었다. 그 범죄자들에게 대통령은 나라의 최고지도자인 동시에 자신들의 범죄를 가능케 해준 두목이었다.

퇴임 이후 문서를 반출한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자기 정부의 공직기강비서관과 특별감찰관을 ‘국기문란’ 사범으로 정죄한 대통령(과 여당)은, ‘현재의’ 국가기밀을 계속 반출하도록 조장·허용·묵인하는 국기문란행위를 자행한 자신에 대해서는 탄핵을 포함해 훨씬 엄한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그가 늘 말한 원칙이고 신뢰다.

종횡으로 연결된 사적 범죄집단의 위세는 공조직을 압도하였다. 대포폰, 차명거래, 외부밀실 회합, 국가재물사취와 이익보장, 주고받기 거래 등 조직폭력배들이 사용하는 어둠의 수법들을 문명국가의 최고 공조직 내에서 지속한 그들이 반(反)국가 범죄집단이 아니라면 누가 반국가·반공화국 범죄자들인가?

국가 권부의 사사화는 국가 공공기구와 시민사회의 열정과 생기, 의지와 창의, 애국심과 헌신을 무력화하여 국가발전을 가로막은 최고 주범이었다. 이런 국가공조직이 국가발전을 이끌 수는 없다. 군대라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꿈조차 꿀 수 없다. 따라서 국가의 사사화는 공화국의 존엄성과 공화국 시민의 존귀함과 자존감을 짓밟은 국가능멸인 동시에 국가파멸의 망국적 범죄다. 

무엇보다도 무녀에게 홀렸다는 논리는 전혀 옳지 않다. 핵심 문제는 구조이며, 구조를 활용한 대통령의 사인적 정신상태와 행동이다. 부패고리는 치밀했다. 그리고 부패를 낳은 국가 주요 정보와 정책의 사적 누설과 사익의 교환은 철저했고 반복적이었다. 대통령을 닮은 사적 행위자들은 국가의 약한 공적 고리 곳곳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국민의 복지와 임금으로 돌려져야 할 자원을 송곳처럼 빼먹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적 친위세력을 공적 길목에 정확히 배치하여 갈취구조를 완성하였다. 부패구조는 마치 ‘조직 내 조직’처럼 공적 결정체계와 소통과정을 무력화시키는 암적 존재였다. 그들은 방송, 체육, 연예, 문화, 올림픽, 교육, 재벌, 대기업, 경제단체에 넓고 깊게 마각을 뻗쳤다. 이들 국가부패구조를 종횡으로 엮는 정점 고리는 대통령이었다. 문제의 본질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모셔놓고 권력-관료-재벌-기업-문화-방송-교육-대학의 상층부가 거대한 부패의 사슬구조를 형성하여 국가를 뜯어먹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금번 부패사슬구조는 전혀 훈련받지 못한 무자격 하류잡범들이 대통령과의 사적 연줄 하나를 무기로 국가 심부를 초토화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특징적이었다. 대통령의 오랜 사적 심부름꾼을 포함한 하류잡범들의 지식과 경력을 보면 이들에게 국가 최고 인재들이 계속 제공한 국가기밀과 결정권한, 굴종과 아부는 애국심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공적 윤리조차 찾기 어려운 서글픈 국가현실을 상징한다. 국가고위직들이 특정 사인에게 업무협조·보고·정보제공·복종·굴종·아첨·공모하는 치욕적인 행태를 반복하는 실상은 국가기강과 공공윤리의 전면 붕괴를 보여주는 표상이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의 가장 비통한 모습이다. 국가공공성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현실에서도 노예적 관료와 지식인들 중 누구도 양심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재벌과의 정경유착은 문제의 심층 본질을 구성한다. 냉혹한 이해타산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대통령의 정치적 뒷배와 경제적 특혜에 대한 기대 없이 일시에 신설 조직에 거액을 갹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 불법행위 묵인과 탈세 무마를 포함한 불법흥정과 거래는 국가를 사설부패집단으로 변모시킨 전두환·노태우의 파렴치한 수법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다. 기업들이 불법 제공한 거액은 노동자들의 피땀이라는 점이다. 재벌 대기업들의 천문학적 이익과 사내유보금은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저임구조로 인해 가능했다. 청년실업이 만연하고, 주요 국가산업이 쇠퇴하고,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숱한 노동자들이 실직당하는 심각한 위기상황에도 국가권부는 스스로가 넓고 넓은 부패공간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정권과 기업의 부당한 결탁이 경제의 추락과 국가퇴락을 가속시킨 요인인 것이다. 대통령 하야와 부패고리 청산이 국가추락을 막고 성장동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필수 요소인 까닭이다.

교육공정성의 붕괴는 금번 사태의 또 하나의 중심 줄기다. 입시는 대한민국 학부모와 학생의 전 생애를 건 승부다. 그러나 부모의 불법 권력과 금력에 힘입어 뒷문입학이 가능하다고 할 때 국가 교육체계의 모든 공정성은 무너진다. 나아가 권력-대학, 부모-교수의 부당한 거래로 학업성취도가 결정된다면 대학교육은 존재의 이유조차 없다. 이 두 모습의 결합은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대학 입시, 공무원시험, 환경미화원은 물론 비정규직조차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 지옥 같은 현실이다. 그 바늘구멍을 뚫기 위해 청년들이 기나긴 날을 사투해야 하는 현실에서 누군가가 부모의 부정부패를 등에 업고 아무런 노력도 없이 쉽게 인생의 성공가도에 들어서는 부당한 현실은 부모와 청년학생들을 격분과 공분 상태로 치닫게 하였다. 이런 언어도단의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박근혜는 박정희의 육체적 2세일 뿐만 아니라 정치행태 역시 고스란히 부활시켰다. 새마을운동, 국정교과서, 국가정보기구 선거개입, 정경유착, 부패구조, 종북공세, 최태민·최순실 일가 부활과 밀착…. 박근혜시대는 박정희시대 통치양태의 부정적 생환이었다. 사실 대통령만 특권적 2세가 아니었다. 박정희를 모셨던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충격적이게도 현 정부의 청와대, 정부 공공조직, 여당의 고위인사 부모들은 상당수가 박정희시대 장관·장군·고위관료·국회의원들이었다. 대통령과 이들 세습 자제의 사사적 특권행태에서 모든 국민을 위한 공화국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정점이 사사화하자 학교·기업·금융·병원·유치원 등 거의 모든 곳에서 재봉건화와 재신분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튼실히 보호하는 공화국 국민과 공적 시민은 실종되고, 낱낱의 사적 개인들만이 거대기구들과 단독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즉 일상 삶의 현장에서 사장·회장·교장·원장·상사를 포함한 소위 ‘갑’들에게 당하는 일반 서민들의 직업적 불안정성과 인간적 모멸은 국가공공성의 해체에 비례하여 말단까지 급속하게 확산된다. 국가권력의 민주화 없이 기초 생활단위와 일상현장의 인간화는 전연 불가능하다. 생활현장의 민주화와 인간적 대우는 국가권력에 대한 공적 통제와 민주화에 비례한다. 그들 각 단위 삶의 불안과 울혈이 불의한 사적 국가권력의 전횡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 금번 국민항쟁이다.

공화국은 본래 소수특권층이 아닌 ‘모두의 복리’ ‘모두의 행복’(common wealth) 또는 공민의 나라(republic)를 뜻한다. 우리가 지금 공화국 대한민국을 소수 부패집단에서 국민 모두를 위해 반드시 다시 찾아와야 하는 이유다. 애국국민들이 국민항쟁을 통해 참된 민주공화국을 재건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명예혁명이요, 시민혁명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끝내 하야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대통령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환부인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에서 ‘식물대통령’을 거쳐 우리는 사상 처음 ‘환자대통령’을 갖게 되었다. 국민항쟁을 통해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질병은 대한민국 전체로 번지고 말 것이다. 하야가 정답인 이유다. 잿더미로 변한 조국의 공공성을 구출하고 공화국을 구원하기 위해 우린 다시 시민적 영혼을 가다듬어 광장에 모여야 한다. 

이번 국민항쟁은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지금은 국가권력과 국민권력의 분리상태다. 이중권력상태다. 즉 정의로운 국민권력과 불의한 정권집단의 격돌이다. 불의한 권력집단은 대한민국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와 국가미래가 끝없이 추락해도 끝끝내 국민과 맞서려는가?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정의를 이기는 불의도 없다. 정의로운 국민을 이기는 불의한 권력은 더욱 존재할 수 없다.

하야 이후 국민의 용서를 기다린다면, 자비로운 국민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엄정수사와 진실고백, 중립내각 구성, 국정 완전후퇴, 비정(秕政) 백서 발간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관용 어린 국민들은 하야 이전이라도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국민과 국가와 본인의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마지막 남은 애국의 기회를 잃지 말기를 눈물로 호소드린다.

박명림 | 연세대학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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