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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때 내 윗옷 안주머니에는 항상 포켓용 헌법전이 들어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틈날 때마다 꺼내서 읽어보곤 하는데,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헌법전의 본문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 제1항으로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즉 ‘국가의사가 자격을 갖춘 국민의 대표들에 의해, 국민의 공적 이익을 위해, 공개된 과정을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국가’라는 중요한 선언이다. 이것은 헌법 개정 절차에 의해서도 바꿀 수 없는 헌법의 핵심조항이다. 그래서 헌법 본문 맨 앞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에 의해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번의 비선 실세 국정농단과 관련해 대통령은 이 ‘민주공화국’ 조항부터 위반했다. 국민이 알지도 못하고 자격도 없는 비선 실세가 공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 밀실에서 국정을 농단했고, 이러한 일이 대통령이 이끈 정부 안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대통령은 헌법 제1조 제2항의 국민주권 원리와 헌법 제67조의 대의제 원리도 위반했다. 우리 헌법은 국민주권 원리에 의해 국가의사 결정권인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규정했다. 다만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국가의사를 결정하지 않고 대의제 원리에 의해 대표를 뽑아 그 대표로 하여금 대신 국가의사나 국가정책을 ‘의논’해서 ‘결정’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개입하거나, 대통령을 대신해 국가의사 결정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대통령도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신성한 권한의 행사에 헌법적 근거 없이 다른 이들의 개입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지, 국민이 알지도 못하는 최순실씨 등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선 실세들은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에 검토하고 국무회의 심의사항을 비서관 등을 통해 미리 보고받으며 인사, 예산 책정 등 대통령의 각종 국정행위에 광범위하게 개입했다. 비선 실세들이 국가의사의 ‘의논’이나 ‘결정’에까지 개입하도록 대통령이 허용했다면 이것은 국민주권 원리와 대의제 원리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셋째, 헌법상 직업공무원제도에도 위배된다. 헌법 제7조 제2항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했다. 직업공무원제도를 우리 헌법상 기본제도의 하나로 규정한 것이다. 이 직업공무원제도의 핵심내용 중 하나가 바로 ‘공무원의 신분보장’이다. 공무원의 신분보장이란 ‘공무원이 정권교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뿐더러 동일한 정권하에서도 정당한 이유 없이 해임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비선 실세 딸의 승마대회 성적과 관련한 비리를 조사해 보고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에 대해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그 직후 이 공무원들이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대통령은 “이 사람이 아직도 있어요?”라고 했고, 이 공무원들은 반강제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해임시킨 것으로 직업공무원제도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헌법학엔 ‘헌법의 수호’라는 개념이 있다. ‘헌법의 핵심적 내용이나 규범력이 변질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헌법에 대한 침해행위를 사전에 예방하거나 사후에 배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20세기 초 독일 등의 학계에서 누가 이러한 책임을 지는 ‘헌법수호자’인가에 대해 논쟁이 불붙은 적이 있었는데, 현대 헌법학자들은 민주국가에서 헌법을 수호할 최종 책임을 지는 자는 주권자인 ‘국민’이라고 본다.

민주공화국 원리, 국민주권 원리, 대의제 원리, 직업공무원제도는 헌법의 기본원리와 제도로서 우리 헌법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들이다. 이번 사안은 이러한 헌법의 근간을 훼손하고 흔들었다. 지엽적인 개별 헌법 조항 한두 개가 위반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통령이라는 엄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비선 실세들의 국정농단을 알았건 몰랐건 결과적으로 이를 가능하게 했다면 이러한 대통령의 행위는 헌법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 된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들은 당연히 이 상황을 ‘헌법 유린’이나 ‘민주헌정의 중단 상황’이라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헌법 위반의 책임을 묻고 헌법 유린과 민주헌정 중단의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우리 국민이 미래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헌법의 수호’이며 ‘헌정질서의 회복’을 위한 행동이다.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헌법과 헌법이 대표하는 국가 체제를 지켜내느냐 아니냐의 헌법수호의 문제이다. 지금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해 나서야 하는 이유다.

나는 다시 품속의 작은 헌법전을 꺼내 든다.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함과 함께 말이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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