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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총회 시즌이다. 올해 주총을 앞두곤 여성 사외이사를 영입하는 대기업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기업은 이사회를 특정 성(性)으로만 구성하지 못하도록 한 개정 자본시장법이 오는 8월 시행되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사내이사 중에 여성이 거의 없다보니, 임기가 끝난 사외이사 자리에 여성을 채워 법을 지키려 했다. 수십년 역사에서 처음 여성 이사가 선임된다는 기업의 뉴스가 여기저기 쏟아졌다.
같은 시기 대통령 당선인은 “여성가족부는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며 ‘여가부 폐지’ 공약 이행 의지를 드러냈다. 당선인의 말은 이사회에 여성 이사가 1명도 없어 부랴부랴 뽑고 있는 대기업의 모습과 겹쳐 우리 사회의 ‘인지 부조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지금도 이 법을 비판하는 분들은 법의 강제성이 기업의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논리와 ‘거수기’에 불과한 사외이사에 여성 1명 추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냐는 무용론을 든다. 여성 이사 1명이 들어간다고 당장 큰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강고한 유리천장에 작은 균열은 낼 수 있다. 이은형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 법의 의미에 대해 “의식이 스스로 바뀌길 기다리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린다”며 “이럴 땐 법이 기존의 관성과 기득권을 깨고 의식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여성 이사가 있다면, 기업은 안건을 올릴 때 여성의 임원 승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여성 이사가 던질 질문에 대비하게 된다. 이사회가 제 역할을 찾는 데에도 긍정적이다. 사회생활을 해 본 남성이라면 남성만 있는 조직과 남녀가 함께 있는 조직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체감으로 안다. 남녀가 섞인 조직이 기업을 감시·감독해야 할 이사회에 더 적합한 것은 물론이다.
기업의 자율에만 맡기기엔 한국의 상황이 심각하기도 하다. 지난달 세계 4대 회계법인인 딜로이트 자료를 보면 국내 이사회의 여성 이사 비율은 4.2%로 세계 평균(19.7%)의 4분의 1도 안 됐다. 그나마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지난해 주총에서 여성 이사가 꽤 늘어난 덕에 4.2%다. 최하위 5개국은 한국 외에 카타르(1.2%), 사우디아라비아(1.7%), 쿠웨이트(4%), 아랍에미리트연합(5.3%)으로 모두 중동 왕정국가였다.
세계 유수의 투자자본들은 이사회의 다양성을 주요 투자조건으로 고려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단기 수익을 추구해선 기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사모펀드 칼라일의 이규성 최고경영자는 지난해 한 콘퍼런스에서 “투자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다양성을 갖춘 시각과 경험이 없다면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며 “투자 기업에 이사회 인원의 30% 이상을 여성과 소수인종 등으로 구성하라고 권고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30%’는 그냥 적당히 산출한 숫자가 아니다. 많은 연구에서 10명 중 1명만 소수자라면 다수에 눌려 제 역할을 하기 어렵고, 10명 중 3명은 돼야 다양성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도 여성 이사 1명으로 ‘구색 맞추기’에 만족하지 말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발 더 다가서기 바란다.
조미덥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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