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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에서 열리는 철학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라고 말했다. ‘용기’야말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virtu)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무너져버린 이념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용기’라는 말이다. 철학에 있어서 지난 30년간을 바디우는 무기력의 시대로 진단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철학은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그가 제기하는 뼈아픈 반성이다. 젊은 세대와 철학이 분리됨으로써, 또는 자본의 요구에 맞춰 훌륭하게 철학이 교양의 영역으로 퇴거함으로써, 상대주의와 냉소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서용순 영남대 학술연구교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은 낯설지 않다. 인터넷을 가득 메운 독설과 조소는 진지함 자체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하지만 현실은 어떤 표현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을 감춘 이들은 인터넷에서 자신의 감정을 소진시키면서 체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는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 없는 실천이 가져온 재난 상황을 우리는 지난 선거 이후 목도하고 있다. 의회정치가 부여하는 판타지는 기본적으로 기성 질서를 거스르는 어떤 정치적 시도도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의 문제가 과거 민주정부의 유제를 보존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자유의 문제가 과거 반공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상황은 정치의 교착상태를 증언한다.
퇴행적인 정치의 상황은 ‘경기동부연합’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체제 바깥의 급진성조차도 낡은 반미주의의 이념으로 포섭해버린다. 가히 근본주의가 상대주의적인 현실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경기동부연합’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경향성이다. 분명한 것은 이슬람 국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공주의와 반미주의라는 근본주의의 부상에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현실의 상대주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경제주의로 환원시키는 논리는 가치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에 빠졌던 보수가 자기 혁신을 단행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은 이런 가치 상대성에 대한 강조 덕분이었다. 자신의 적조차 상대화해서 선별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자신감을 보수는 획득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난 30년간 우리가 목도한 이른바 ‘자기계발의 사회’이다. 적대보다 의사소통을 강조했던 ‘시민사회’는 각자도생하는 개인의 이합집산으로 전락했다.
진리에 대한 추구를 비웃는 냉소주의는 기본적으로 비즈니스맨의 이데올로기이다. 기존에 통용되던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형식을 통해 내용을 재창조하는 것이 상품화의 원리라고 한다면, 냉소주의는 이 원리에 따라 욕망을 배치하는 자본주의형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냉소주의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냉소주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탈(脫)이데올로기 상황에 견딜 수 없는 이들이 근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전체주의는 이렇게 낱낱이 흩어진 원자적 개인을 하나로 끌어모으는 매력적인 대상을 선사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그것은 “우리는 언제나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 일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그 일은 위대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때 새로운 전망을 열어낼 정치는 억압되고 낡은 이념에 복무하지 않는 배신자를 찾아내어 집단수용소로 보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대담을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DB)
말하자면, 바디우가 말하는 ‘용기’라는 것은 이렇게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용기’는 실패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역량이 ‘용기’라는 것은 저절로 이런 마음가짐이 주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역량은 갈고닦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용기’는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유에 대한 요청이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기 위해 필요한 사유, 여기에 ‘용기’의 의미가 있다. 상대주의의 시대에 새로운 이념을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이 냉소주의를 이겨내고, 기성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정치라고 호령하는 온갖 습속을 거부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다.
박근혜 정부를 출현시킨 그 보수주의의 논리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다. 이제 그 출발점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정치를 복원하고, 다시 대중운동과 이념을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교착상태에 빠진 진보의 궁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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