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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밀양, 후쿠시마. 요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설명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라는 생각이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삼성의 신입사원 모집에 9만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이 9만명의 지원자가 누구겠는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스펙’을 자랑하는 젊은이들일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수없이 많은 경쟁의 관문을 통과해서 도달한 최종 지점에 삼성이라는 ‘평등의 고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고원’에 올라가야 젊은이들은 ‘평등’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평등은 고원 위와 아래를 나누는 불평등에 대한 동의를 전제한다.
이 ‘평등의 고원’을 유지하는 것이 이를테면 한국의 경제주의이다. 고원의 위와 아래를 나누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합리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정당한 노력을 했다면 ‘평등의 고원’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위와 아래를 구분해주는 것이 필수이다. 이런 방식으로 경제주의는 첨예한 개인의 이해관계를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억제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지나친 개별적 이익의 추구는 산업 자체의 존재 기반을 허물 수 있다는 경험이 여기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경제주의는 개인의 이익에 근거한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치 과잉’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삼성 같은 대기업이 국가를 제치고 가장 신뢰도 있는 기관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삼성이야말로 합리성의 기준이고 체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의회정치를 비롯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기업의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합의를 도출한다. 삼성이 이런 지위를 획득한 것과 한국 사회의 변화는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민주화는 산업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바로 현실원칙을 구성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원칙에 반하는 풍경이 지금 밀양에서 펼쳐지고 있다. 밀양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대중의 합의에 근거한다는 한국 사회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사태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가 합의하는 기준에 맞춰보면 밀양의 노인들은 개별적 이익에 얽매인 ‘이기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외부세력’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순진한 바보’일 뿐이다. 합의되었다고 전제했던 정책이 외면하고 배제한 것이 밀양이라는 장소성에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 입장 차이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합의에 기초한 정책결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밀양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3년 10월18일 (출처 :경향DB)
밀양은 끊임없이 자기 몫을 주장함으로써 대중의 합의가 지워버린 정치를 환기시킨다. 이 합의는 정치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경제주의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밀양의 문제를 야기한 한국의 에너지정책은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경제구조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값싼 전기료를 위해 원전이 필요한 것이고, 원전의 위험성 때문에 원거리 송전탑이 건설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밀양의 문제는 진보와 보수의 차원을 떠나서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체제의 성격 때문에 발생한다. 이 체제를 유지하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가 만인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밀양이다.
밀양은 후쿠시마의 다른 면이기도 하다. 아직 후쿠시마는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수준에서 거론되고 있지만, 실상은 더욱 끔찍한 진실을 웅변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문제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방사능 피해는 세계적인 것이고, 이에 대한 책임도 특정 국가에 한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 재앙에 대한 확실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라는 예정된 파국을 염려하면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해괴한 침묵이 발생하고 있는 것인데, 심지어 당사자인 일본 정부는 이런 심각성을 본체만체하며 올림픽 개최라는 황당한 대책을 내놓았다.
밀양이든 후쿠시마든 합의에 기초한 체제의 논리가 만들어낸 사태다. 둘 다 동일하게 체제의 논리 바깥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경제가 세계의 완전성을 강변하는 것이라면, 그 완전성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제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 밀양과 후쿠시마가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밀양과 후쿠시마는 특정한 장소를 넘어선다. 완벽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경제주의의 합리성을 통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이 문제는 근시안적인 대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촉구를 유발하는 것이다.
‘평등의 고원’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제한적 평등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불평등을 문제 삼을 수 있을 때, 변화는 가능하다. 그러나 외면과 배제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밀양과 후쿠시마야말로 고원 위의 평등을 보장하는 지금 이 체제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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