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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라는 말만큼 남용되고 있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인문경영이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급기야 인문힐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2012년 11월 세계적인 인문학자를 초청해서 부산에서 치러진 한국-유네스코 세계인문포럼의 주제는 ‘치유의 인문학’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런 기조를 유지할 모양이다.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처음 가진 공식적인 오찬 모임에 박 대통령은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했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 한 참석자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하며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고양시킨다’는 마지막 대목이 있는데, 대통령께서 영원한 여성의 이미지를 우리 역사 속에 각인하셔서 우리 역사가 한층 빛나기를 기원한다”고 발언해 논란을 낳고 있다.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과 인사하는 박대통령 (경향DB)


인문학의 어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인 휴머니티스(humanities)라는 단어는 18세기에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를 가지게 됐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15세기에 ‘인간의 문화에 대해 공부하는 수업’을 지칭하는 말로 등장한다. 특별히 이 말이 필요했던 이유는 신이나 자연과학의 영역과 다른 무엇으로서 인간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문학이야말로 서구 르네상스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불기 시작한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특별히 새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인문학만큼 확실하게 제공할 수 있는 분야도 없기 때문이다.


신학이 신의 섭리를 체계화하고 과학이 자연의 법칙을 명료하게 해독한다고 해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가 헤겔을 비틀어 말한 것처럼 신전은 훌륭하게 지어놓고 정작 인간은 초라한 집에 살게 됐다는 자각이 인문학의 출발점인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운위되고 있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비슷한 문제의식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물질을 우선에 놓다보니 인간의 정신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는 인식은 이제 상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 대통령을 만난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의 발언에서도 확인되듯이 물질중심주의에 대한 해결책은 인문학 부흥 또는 중흥이다. 박 대통령 여기에 인식을 같이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동의가 도달한 지점이 인문학 없는 창조경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이런 도식이야말로 지극히 경제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보도가 나간 뒤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일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보도에서 사용한 ‘인문정신문화계 인사들’이라는 표현에 실마리가 있는데, 과거에 사용했던 ‘정신문화’라는 말이 다시 돌아왔음을 깨달을 수 있다.


강연하는 박종홍 박사 (경향DB)


한국에 이 용어를 도입한 대표적인 인물이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일 것이다. 박종홍은 박정희 시절에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대략 5년간 했는데, 자비를 털어서 인문학과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학계에서 벌어진 박종홍에 대한 논란은 독재정권에 우호적이었던 권력친화적인 처신에 대한 것으로부터 이른바 ‘한국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냈다는 업적에 대한 것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죽기 전까지 국민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재정문제로 연구원이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하지 못하고 박종홍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지는 후일 지금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구체화됐다.


이렇게 박종홍이 제도화시킨 ‘정신문화’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문화라는 용어에 내재해 있는 계발이라는 의미를 극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이런 뜻으로 최초로 사용한 사상가가 키케로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신 또는 영혼의 계발’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용어법이 번역돼서 교양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 가능하다. 정신문화라는 말이 오찬 모임에서 등장한 것이 우연한 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하게 될 인문학 중흥이 궁극적으로 정신문화에 있다면 계몽주의의 입장은 불가피해진다. 박종홍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계몽의 완성은 국가체제와 국민의 일체화다.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 도표, 이미지컷


국가와 하나 되는 인문학은 과연 인문학 본연의 가치일까? 인문학에 대한 국가 지원을 늘리면 자연스럽게 인문학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정신문화에 반대되는 것인 셈이다. 입으로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실제로 그 비판의 대상을 강화하는 모순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르네상스적인 의미에서 인문학이 진보적인 맥락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중세적인 신학의 권위나 실증적인 과학기술의 독단에 도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인문학이 정치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은 바로 이런 인문학일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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