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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한국의 보수주의가 지지한 이념은 민주적 자본주의였다. 경제적 차원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진행되고 인재육성과 생산성의 상관관계가 운위되던 한편으로 정치이념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추동한다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명제가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졌다. ‘모두가 부자 될 수 있는 자본주의’나 ‘인민자본주의’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이 때문에 가능했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멋진 유토피아인가. 모두가 부자 되고 권력의 주인이 된다는데, 이보다 더 환상적인 약속은 없을 테다. 진보 내에서도 자본주의를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이런 전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는 보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위기’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의미했고, 이것이 곧 민주주의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경제칼럼에서 가장 눈에 띈 구절이 ‘시장의 왜곡’이었고, 정부 규제 완화나 노동조합의 자제를 호소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었다. 무엇보다 남북한을 비교하면서 남한이 체제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근거로 민주적 자본주의의 특성을 예로 들곤 했다. 민주적 자본주의는 미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이념이기도 하다. 이 이념의 핵심은 시장 기반 경제가 민주적 정책, 성실한 납세, 개방적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도덕적인 책임감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개방성에 근거한 다양성에 대한 지향이 민주적 자본주의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의 다양성이 개방성의 지표였고, ‘시장의 왜곡’이라는 것은 국가의 간섭이나 독점에 의한 획일성을 의미했다. 민주적 자본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체제에서 획기적 성공을 거뒀다. 특히 한국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런 이념이 군사독재가 전횡을 휘둘렀던 개발국가에 민주주의를 강제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산책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경향DB)
한국에 대한 미국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한국에 바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화를 전제하는 것이었는데, 이른바 ‘민주화 이후’를 되돌아보면 한국 사회가 참으로 성실히 이런 민주적 자본주의 이념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보수정권보다도 진보정권이 더 열심히 민주적 자본주의의 긍정성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진보를 표방했으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 추진한 것으로 비판받는 참여정부도 실제로 실천한 내용을 보면 민주적 자본주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민주적 자본주의 수행 능력 여부가 선거에서 중요하게 거론되었던 쟁점이었다.
여하튼, 한국의 보수와 중도는 박근혜 정부를 선택했다. 박근혜 정부를 도덕의 프레임으로 예단하려고 할 때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판이 가능하려면 체제의 논리 밖에서 상황을 조감할 수 있는 관점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 내에서 동일한 이념을 공유한 진보와 보수가 서로 능력을 겨루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비판은 적절한 타격점을 찾을 수 없다. 문제는 민주적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 반성이고, 이와 다른 이념에 대해 제안할 수 있는 발본적 태도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현한 것은 민주적 자본주의 이념이 위기에 봉착한 탓이다.
볼프강 스트리크는 2011년 ‘뉴레프트 리뷰’에 기고한 논문에서 고도성장이 멈춘 1970년대부터 민주적 자본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나마 조화롭게 보였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경기침체라는 위기 상황에서 불일치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후 전개된 다양한 정책들은 이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가설이다. 한국에선 참여정부가 민주적 자본주의의 지향을 가장 강력히 드러낸 정부였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 발언은 위기의 원인이자 중심이었던 민주적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이라는 말은 어쩌면 참여정부에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있다. 지금까지 정언명령처럼 전제해온 ‘민주화’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되물어볼 시점이 됐다는 생각이다.
(경향DB)
박근혜 정부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위기에 피로를 느낀 보수와 중도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이 정부가 자본주의보다 민주주의에 방점을 찍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민주적 정책과 자본시장의 논리가 충돌할 경우 후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 논리를 철저히 관철하는 것이 민주주의 완성이라는 착각을 더 가속화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자본주의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부가 답해야 할 것이다. 창조경제라고 호언하긴 했으나 아직 정확한 답안을 제시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역설적으로 이런 한국의 선택은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함을 암시한다. 즉, 민주적 자본주의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충돌하는 명제임을 한국 사회는 증명하고 있다. 바야흐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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