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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한 인터뷰에서 나는 현 정부를 ‘유랑도적단’에 빗댄 바 있다. 유랑도적단이란 경제학자 맨커 올슨이 <권력과 번영>이라는 저서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그는 정치권력과 경제적 번영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어차피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닐 바에는 ‘유랑도적단’보다 차라리 ‘정주도적단’이 낫다고 지적하였다. 정주도적단은 이듬해에도 수탈해야 하기 때문에 씨앗이라도 남기지만, 한 번 털고 떠나는 유랑도적단은 씨앗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단임제 정부가 1987년에 가졌던 역사적 효용성을 차츰 잃어버린 끝에 이제는 유랑도적단과 같은 대통령 무책임제의 폐해만 남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이 표현을 빌려 쓰면서 이것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올슨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에 대한 건강한 풍자조차 금기가 되어버린 현실을 잘 알기에 공연한 말길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지켜보며 나 스스로가 아직도 얼마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지 깨닫게 됐다. 유랑도적단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학자들이 비판이랍시고 비유나 하고 있을 때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비판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실제로 나라를 털어먹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검수사를 통해 그리고 헌재 판결을 통해 드러났다. 특검수사가 본궤도에 오른 이후 나는 칼럼을 통해 박근혜를 언급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이제 적어도 대한민국의 공적인 영역에서 영원히 퇴출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인 박근혜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새로 만들 세상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면당한 전직 대통령이 사흘 만에 내놓은 메시지를 보며 아직도 나는 세상 물정 깨달으려면 한참 멀었음을 알았다. 그는 퇴출당할 생각도, 자연인으로 돌아갈 생각도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 말해야 한다.

흔히들 ‘친박(親朴)’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왔다. 친박이 아니라 ‘용박(用朴)’이 맞다. 박근혜와 친한 것이 아니라 박근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때 박근혜의 입으로 불렸던 전여옥 전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그를 떠나며 자신이 겪은 여러 경험과 인물평을 남긴 바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니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다. 거기에는 여러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한때 친박이었던 많은 정치인들은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이 된 후 변했다’고 말한다. 모두 거짓말일 것이다. 몰랐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나 같은 백면서생도 알았다. 지난 대선이 있던 2012년 한 해 동안 지면을 통해 발표한 칼럼들을 다시 뒤져 읽어보니 정책과 철학의 빈곤, 맥락은 사라지고 원론만 반복하는 특유의 어법, 정상 상황에서는 한번도 리더십을 발휘한 적이 없고 콘크리트 지지층에 기대어 위기돌파에만 능한 그의 경력, SNS를 통해 대대적으로 펼쳐진 의심스러운 여론조작 정황 등이 마치 본 듯이 적혀있다. 그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일개 학자 눈에도 뻔히 보이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정치인들이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도 그의 상품성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한 것이다. 현대사의 굴곡으로 인해 박근혜가 저절로 가지게 된 엄청난 상품성, 결함이 있지만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폐쇄성, 거기에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못하는 철학과 정책의 부재까지. 노회한 정치인들이 앞장세우고 이용하기에는 최선의 조합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친박이 아니라 용박이다.

용박이 그를 이용했다면 그는 국민들을 이용했다. ‘용민(用民)’이다. 박근혜인들 친박이라 불리는 용박이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하지만 알면서도 짐짓 이용당해 주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니 기꺼이 이용당했을 것이다. 오늘까지 삼성동 자택 앞을 지키는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빈곤과 전쟁의 상처를 뚫고 솟아오른 대한민국의 도약을 함께했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무한한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다. 뒤늦게 이용당했음을 깨닫고 등을 돌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끝까지 그를 믿어주는 사람들이다. 헌정사상 최초로 파면당함으로써 국격을 떨어뜨리고 사흘의 침묵 끝에 내놓은 메시지는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했으니 10% 남짓 남은 열성 지지자들을 볼모로 해서 나라야 망하거나 말거나 또다시 진흙탕의 정치싸움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철저한 ‘용민’이다. 그는 자연인 박근혜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정치인 박근혜로 돌아왔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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