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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예언이 실패할 때>라는 책이 있다. 레온 페스팅거와 두 명의 동료들이 함께 쓴 사회심리학의 고전이다.

미국의 주부였던 마리안 키치는 어느날 자신이 클라리온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명을 받아 그들의 말을 글로 써낸다고 주장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분신사바’ 같은 행위이다. 그는 1954년 12월21일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며, 진정으로 믿는 자만이 외계인의 안내를 받아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고 재산을 헌납했다. 지구 멸망 직전인 12월20일 밤, 그들은 외계의 방문자를 기다리기 위해 한곳에 모였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고 밤 12시5분이 되었는데도 외계의 방문자는 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집 안에 걸려있던 시계 중 하나가 아직 11시55분을 가리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직 자정이 지나지 않았다는 데에 합의했다. 10분 후. 모든 시계가 다 자정을 넘겼고 그들은 침묵했다. 새벽 4시45분. 마리안 키치는 또 한 번의 ‘분신사바’를 했고, 그들의 진정한 믿음 덕분에 외계인들이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로 했다고 알렸다. 키치의 거짓 주장 때문에 직장과 학교와 재산을 잃은 ‘믿는 자들’은 키치에게 분노하기는커녕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한국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시작은 박근혜의 열혈지지층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그런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초저녁이었다. 탄핵안이 발의되자 가결될 리가 없다고 믿었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탄핵안이 가결되자 헌법재판소가 인용할 리 없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생계를 뒤로 미룬 채 헌재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정미 재판관이 주문을 읽었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자정을 넘긴 밤 12시5분이었다. 어떤 이는 탄핵을 무효화할 수 있다고, 또 어떤 이는 태블릿PC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직 11시55분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곧 모든 시계가 자정을 넘겼다. 그들은 침묵했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새벽 4시45분. 한국판 마리안 키치가 나타났다. 그는 또 한 번의 ‘분신사바’를 통해 자정 이전의 세상을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침묵하던 ‘믿는 자들’은 ‘선교’를 시작했다.

오늘 밤 우리는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짧게는 박근혜 정권 ‘혼용무도’의 4년을, 길게는 수십년 동안 천천히 진행되어온 국가의 마비 상태를 끝내고 이제야말로 전혀 다른 대한민국을 시작해야 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필자가 여러 기회를 빌려 주장해왔듯이,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 성장률의 지속적 하락,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동북아의 긴장상태를 보면 새 정부 5년이야말로 대한민국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다. 이번에 못하면 영원히 못한다. 주요 후보만 해도 다섯 명으로 치러진 이번 대선을 통해 국민들은 여러 편의 ‘믿는 자들’로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광신도가 되었고 어떤 이들은 가벼운 동조자가 되었지만, 정치란 원래 유권자들을 가름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니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거국면과 선거 이후는 달라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했었던 가장 나쁜 일은 계속해서 국민들을 편가르기 하고 자신들의 광신도를 만들어냄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 정부는 같은 일을 반복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상대편의 ‘믿는 자들’에게 또 다른 ‘분신사바’를 기다리게 하면 다 같이 망한다.

<예언이 실패할 때>의 저자 페스팅거는 두 가지 조언을 한다. 첫째, 법과 원칙의 적용이다. 선교를 이어가던 마리안 키치의 종교집단은 결국 사법당국의 개입이 있은 후에야 그 활동을 중단했다. 새 정부의 과제로는 개혁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법과 원칙의 적용은 공정하고 완만하며 일관된 것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시스템을 통한 차분하면서도 끈질긴 개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믿는 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인정하는 고통을 줄여주어야 한다. 하나의 정치세력을 오랫동안 지지해온 사람들일수록, 설사 그들이 자신을 배신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커다란 고통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패배라는 현실을 눈앞에 들이대면 그들은 현실을 인정하기보다는 더 열성적으로 선교하며 또 다른 ‘분신사바’를 기다린다. 새 정부의 과제는 ‘통합’의 영역이자 ‘정치’의 영역이 될 것이다. 오늘 밤 만나게 될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이 새 정부의 사회심리학을 깊이 숙고하기를 기원한다. 그래야만 그토록 기다려왔던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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