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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대가의 어록과 학계의 연구와 속세의 ‘썰’을 모아보면 대답은 태산보다 거대할 것이다. 난해하거나 자명하고 진중하거나 농담 같고 상투적이거나 발칙한 예술론의 백가쟁명에도 불구하고 바탕엔 ‘예술은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18세기 부르주아 미학의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

반면 소설가 한창훈에겐 이런 질문 자체가 ‘지랄’ 맞게 커서 문제다. 너무 커서 삶의 한계를 초월하는 질문은 감각과 정신을 헐벗게 만들기 쉬워서다. 하여 “문학 바깥에 있는 비문학이 더 중요하다”고 잘라 말하는 작가에겐 밥과 일과 놀이의 비예술 생활세계에서 빚어지는 희로애락을 경청하고 참여하며 기록하는 실천이 예술이다.

7월에 나온 그의 연작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한겨레출판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는 한 줄의 법조문만 가진 섬나라의 사람들을 그렸다. 이 소설을 읽으며 지랄 맞은 폭염을 견뎠고 지랄 맞지 않은 예술을 상상했다.

5년 전 1월이었다.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를 쪽지에 쓰며 “죄송합니다”를 반복한 32세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고독사했다. 한 해 뒤 정부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턱없이 작은 예산에 권리가 아닌 시혜처럼 주어진 예술인 복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여전한 가운데 ‘창작지원금 사업’ 수령자가 전국 2354명으로 집계됐다(2015년 12월10일 기준).

문제는 이 바늘구멍이 예술인 스스로 자격증명이라는 행정절차를 통과해야 하며 지원 기준도 사회공헌과 창작활동계획, 생계위기, 창작준비금 등으로 오락가락한다는 점이다. 박인숙 새누리당 의원이 작년 국정감사에서 ‘창작준비 지원과 생계형 복지 지원 투 트랙 확대’를 주문하고 복잡한 증명 절차를 줄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와 보건복지부에 당부할 정도였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종사자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겠지만 사정이 이렇다면, 국가정책으로 예술인 복지를 말하는 노릇은 낯 뜨겁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18일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을 발표했다. 대표사업 3가지는 이렇다.

첫째는 예술인 공공임대주택을 현재 50호에서 1000호까지 늘리고, 낡은 아파트를 예술인 주거+창작 공간으로 재생해 낮은 월세로 장기 임대하며, 민간의 창작공간 300곳에 임차료를 지원하고 자치구 유휴공간 100곳을 공유형 창작공간으로 조성하겠다. 둘째는 사회적 예술 일자리 1만5000개를 만들고 예술인 표준 보수지침을 적용하겠다. 셋째는 청년과 신진 예술인을 위한 ‘최초예술지원’ 1000건과 같은 신규 사업들과 기존 사업을 묶어 “장애 없는 창작활동”을 지원하겠다.

서울시는 이외에도 넷째로 예술인 교육 확대 및 해외교류 지원과 다섯째로 대학로 서울연극센터를 ‘예술청’으로 증축해 기능을 전환한다는 것을 아울러 “5대 희망 의제”라고 포부를 밝혔다. 계획대로라면 서울에 사는 예술인의 복지는 한결 나아질 것 같다.

문제는 주거와 작업공간, 일자리, 창작, 교육과 해외교류 등의 지원을 제각기 공급하지 않고 지역이라는 터전에서 통합하는 전략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지원을 바탕으로 예술인들이 지역재생에 참여하며 주민과 공생하는 생태계를 스스로 만들게 하는 방향과 전망도 안 보인다. 이 점에서 ‘서울예술플랜’은 ‘쌀이나 김치를 구하는 예술인’의 지상에는 천착했어도 ‘신성하고 고귀한 예술’의 천상이라는 과거의 미학을 바꾸는 데로는 나가지 못했다.

해서 다시금 질문 앞에 선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지금 이 장소에서 나와 친구와 이웃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정부와 서울시의 예술인 복지정책 및 예술정책은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예술언어와, “정치적 공공성에 기여하는 ‘자기갱신’”의 예술경험과 “삶의 인간화를 실현하는” 예술실천은 일부 문화·예술인이나 소수파의 간절한 염원일 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미덕을 체질화하고 생활화하고 내면화하는 것 자체”의 접근법으로서 예술은 “한국 사회가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이건만 좁고 위태로우며 그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인간”이 걷는 예술의 길로 남아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기록적 폭염보다 지랄 맞다. ‘천상의 예술’은 이미 추락했는데 ‘예술의 지상’을 위한 서울시와 정부의 정책은 요원하다. 특히 ‘서울예술플랜’에 부족한 결정적 2%인 지역 생태계 구축의 전략 부재를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지랄 맞지 않은 예술이 지역 도처에 있는데도 말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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