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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이제 우리의 생활이 되고 있다. ‘안전지대 한반도’라는 통념은 이미 깨졌다. 올여름부터 집중적이고도 연쇄적으로 겪는 폭염, 지진, 태풍, 원자력, 북핵의 문제는 더 이상 평소와 달랐던 천재나 인재의 경고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이라 불렀던 생활세계의 토대가 수시로 일거에 아수라장이 될 수 있다는 현실감이다. 올해의 남은 날들과 내년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재난의 생활화’라는 오늘보다 더 확실한 내일이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와 함께 하늘과 바다와 땅의 재난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블랙홀 같은 트라우마로 내면화되고 있다. 더불어 드러난 문제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와 정치만이 아니다.

만약 한반도 전역으로 재난이 파급된다면, 그날을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왔고 어떻게 행동하며 폐허에서 어떤 관계 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우리가 무지, 무감하다는 사실이 진짜 문제다. 그날 며칠 전부터 지구촌 어딘가로 이동할 1%를 제외하면 여기 남는 우리는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삶을 진작 바꾸지 않는다면 공멸한다. 대재앙을 거쳐도 살아남았던 인류사의 모든 문명과 공동체의 시금석은 단 하나였다. 위기 속에서 여성과 노인, 장애인과 환자, 어린이와 젊은이부터 구하고 살아남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대한 영웅’이나 ‘모성애 많은 민족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생존과 지속을 위해 저장된 집단지성 덕분이다.

그 집단지성은 위기 때면 자동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위안의 장소’를 두고 ‘환대의 공간’을 운영하며 ‘격려의 관계’를 증진하는 생활세계의 안전망을 유지하고 있을 때 생사를 다투는 그 순간에도 발휘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집단지성의 사례는 근자에도 있었다. 5년 전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 때였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 앞에서 정부와 도쿄전력이 진상 은폐와 책임 회피에 긍긍하는 동안 이재민에게 심신의 위안을 준 곳은 동네 편의점이었다. 공공의 구호가 미치지 못하는 그때 편의점에선 식수와 음식은 물론 화장실과 온수를 제공했고 전국 점포망을 통해 피해지역에 상품 공급량을 늘렸다.

편의점이 곧 재난 물류센터라는 집단지성의 기원은 21년 전 고베 대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정부는 지진 발생 후 6시간 뒤에 대책본부를 꾸렸고 대책 발표엔 하루 넘게 걸렸으며 총리는 TV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반면 한 편의점 본사는 피해지역의 편의점 343개 중 272개 지점이 피해를 입었으나 사장과 직원 360명이 급파돼 별도 본부를 꾸리고 피해 점포를 3시간 만에 영업 재개시켰다. 지진으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 이 편의점은 24시간 영업하며 이재민에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제공했다. 이들은 대재난 앞에서 자신들이 이재민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베 대지진 이후 내각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총리는 사퇴했다. 반면 그 편의점은 도호쿠 대지진 발생 땐 재난 물류센터를 넘어 정보센터 역할까지 했다. 이렇게 일본인에게 편의점은 민간 기업이 만든 사회안전망이자 가장 신뢰받는 공공서비스 체계가 됐다. 편의점은 이제 물품을 사는 곳이자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경험하는 곳이다. 일본 지방정부들은 편의점과 재난 대비 협정을 맺었고 중앙 정부는 ‘재해 시 편의점 정보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역할을 미국 뉴욕에서는 공공도서관이 더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15년 전 9·11테러 때도, 4년 전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도 뉴욕 시민들은 도서관 홈페이지부터 찾고 이재민은 도서관에 가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9·11테러 때 도서관 홈페이지는 공포를 조장하는 대중매체와 달랐다. 대피소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와 헌혈을 연결했고 소식이 끊긴 사람을 찾게 도와줬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와 정치를 선입견 없이 이해하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트라우마 치료와 상담을 제공했다. 평소에 뉴욕 공공도서관은 보건소이자 취업센터이고 창업교실이며 편의점이자 동주민센터이고 결혼식장이자 예술극장이다. 이러니 테러와 허리케인은 물론 영화 <투모로우>의 한파와 쓰나미에도 마지막 피난처는 공공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두 사람의 기금을 토대로 비영리단체가 시민 기금과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우리는 어떤가. 편의점은 모르겠으나 민간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수지의 느티나무도서관이 으뜸일 게다. 자치구와 마을이 협력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은평의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있다. 자치구가 만든 공공도서관의 혁신 사례로는 성북의 10개 구립도서관이 있다. 이들 도서관의 공통점은 ‘도서관답지 않게’ 주민의 생활과 결합하며 집단지성의 공간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구립 공공도서관만 123개가 있다. 작은 도서관은 905개가 있다. 이는 동주민센터와 투표소에는 못 미치나 그 다음으로 많은 수다. 우리 동네의 민주주의는 지금 이들 도서관에서 생활문화의 혁명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곳이 재난의 그날이 왔을 때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기대하며 찾는 우리 동네의 피난처였으면 좋겠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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