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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학교 다니면서 별일 다 했지만 해란씨는 정말 고난의 행군이었더라고. 요즘 애들 하듯이 인턴, 공모전 이런 식으로 채운 것도 아니야. 노동, 말 그대로 노동 현장에서 뛰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영주씨는 말 그대로 버젓한 경력, 응? 정식 회사에서 일한 경력으로 이 자리에 왔고 말하자면 팩에 든 고기지. 원래 생산할 때부터 정식 팩에 든 고기. 해란씨는 ‘주먹고기’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 목살 근처 아무 살이나 주먹구구식으로다가 막 썰다보니까 어, 제법 이게 어엿한 상품이 돼 있는 거 말이야. 주먹고기, 내가 비유가 이렇게 좋아. 주먹고기 좋아하나?” 퇴근길, 부장의 한마디로 졸지에 고기가 되어버린 영주씨와 해란씨는 김금희의 단편소설 <조중균의 세계>에 나오는 입사 동기다. 경력직과 신입으로 함께 들어왔지만 수습 기간이 끝나면 한 명만이 남게 되는 회사에서 ‘석연찮은 경쟁을 벌여야 하는 사이’다. 일단은 경력이 확실한 영주씨가 유리해 보이지만, 해란씨는 만만치 않을뿐더러 ‘반짝반짝’하기까지 하다.

청년층 첫 일자리 중 '1년 이하 계약직' 비율. ⓒ 경향신문DB

어쩌다보니 ‘팩에 든 고기’가 된 나는 소설 속 해란씨처럼 눈을 반짝이며 “문화예술계에서 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20대들을 만날 때마다 심경이 복잡해진다. 과연 이렇게 반짝반짝하고 열정 넘치는 청춘들 대신 일할 자격이 충분한 걸까 싶어서. 단지 내가 몇 년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일자리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취업난과 스펙 경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졸업했고, 덕분에 ‘팩에 든 고기’가 될 경력을 쌓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나 영주씨가 가질 수 있던 기회의 문은 닫힌 지 오래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일할 기회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큰 간극이 생기고, 그 간극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만 봐도 그렇다. 관련 교육기관이나 프로그램이 생기고, 법률과 자격증이 갖춰지는 등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일하려는 사람도 넘쳐난다. 다만 일자리가 없을 뿐이다. 지역문화진흥법, 문화기본법, 문화다양성 관련 법 등 최근 새로 제정된 중요한 문화 3법에 ‘문화인력 양성’ 관련 내용이 모두 있음에도 ‘양성 그 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진입장벽이 높아지는 것도 문제다. 자격증 없이 진입이 가능했던 일자리도 자격증을 요구한다. 수백만원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 자격증을 딴다 해도 지원할 자격이 생길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 경력만 뽑으면 나 같은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는 항변은 ‘경력 있는 신입’을 요구하는 현실 앞에 무기력하다.

실제 최근 2주간 문화예술계의 채용 공고를 살펴봤더니 인턴, 단기 스태프, 보조인력, 기간제 근로자, 대체인력을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규직을 명시한 채용은 단 1건, 그나마도 경력직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쪽 업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20대를 만날 때마다, 여자 후배라면 더욱 “웬만하면 외국에 나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권한다. 열심히 일해보고 싶다는 후배의 등을 두드려주지는 못할망정 밀어내는 나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서글프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몇 십억원 규모의 국가 프로젝트 운영조차 용역업체 소속 파견직 직원에게 맡기는 것이 ‘문화융성’과 ‘문화가 있는 날’을 부르짖는 정부 산하기관의 현실이니까.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은 영주씨다. “아무도 해란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있다 떠난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해란씨는 그대로 사라진다. 인력 양성도 좋지만, 경력을 열심히 쌓아도 기회 자체가 차단되어 있는 이들이 갈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먼저다. 해란씨 같은 사람들이 잠시 있다 떠나지 않도록, 남아서 일하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할 때다. 해법을 모색하고, 고민을 모을수록 해란씨가 돌아올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 책임만큼은 영주씨처럼 살아남아 ‘팩에 든 고기’가 되어버린 기득권의 몫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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