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웹툰 <후레자식>(김칸비 글, 황영찬 그림)이 고소당했다. 고소인은 <후레자식>을 “목적 없이 살인을 하는 살인자가 아버지인데, 자식에게 살인을 가르치고 함께”하는 작품으로 요약했다. 전체 92화 중 도입부 14화까지 내용 중 몇 장면을 캡처해 잔혹성, 여성비하, 노인멸시, 장기밀매, 원조교제에 대한 증거로 첨부했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나, 이건 틀렸다. 미디어의 노출, 콘텐츠의 표현 수위는 고소의 대상이 아니라 토론해야 할 문제다. 청소년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먼저 ‘전 연령 구독가능’이라고 하지만, <후레자식>을 초등학생들이 보지는 않는다.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보편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방귀대장 뿡뿡이>나 <꼬마버스 타요>를 청소년들이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레자식>도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과 작화의 특징 등으로 인해 청소년 이상이 주로 구독한다. 두 번째, 미디어에서 묘사된 폭력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건 명확하게 결론 내리지 못한 논란의 대상이다. 연구자나 연구 설계와 방법에 따라 유해함과 무해함이 다르게 나타난다. 세 번째,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대부분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통제 수단의 하나로 활용된다. 부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통제보다는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보편적 합의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불안에 충분히 공감한다. 험한 세상에서 우리 아이가 좋은 것만 보고 자라나길 원하는 건 아버지로서 당연한 욕망일 것이다. 청소년들이 <후레자식>을 보는 것이 아이들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할 정도로 위험한 일일까? 큰 회사의 사장이자 평판이 좋은 선우동수는 사이코패스 연속살인자다. 그는 아들 선우진을 자신의 살인에 동참시킨다.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의 악행에 동참하던 선우진은 17세가 돼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게 되고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아무리 “난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야”라고 결심하지만, 무게 추가 너무 기운다. 아버지는 모든 걸 갖고 있고, 아들은 약하고, 친구도 없는 왕따다. 그런 선우진이 학교 일진 재혁과 부모가 남긴 빚에 쫓기는 전학생 윤견과 친구가 돼 절대악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살인의 기술을 가르치는 만화가 아니라, 17세 소년의 성장 스토리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현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예를 들어 학원 스포츠 같은 허무맹랑한 건강함 대신 사이코패스 아버지의 손에서 탈출하는 스릴러 장르의 틀 안에서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마주한 것이다. 청소년들은 일상에서 모든 기득권을 독점한 기성세대가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지만, 사실은 선우진처럼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청소년들이 보기에 기성세대는 모든 걸 독점하고 자신들을 경쟁의 틀 안에 밀어 넣은 사이코패스라 생각할 수도 있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많은 콘텐츠들은 당대를 반영한다. 특정 작품에 대중들이 환호하는 건, 그 작품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와 대중들이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후레자식> 말고도 더 높은 수위의 스릴러들이 많이 있지만, 청소년들이 이 작품에 환호하는 까닭은 선정적인 설정이나 장면(은 의외로 많이 나오지 않는다)을 은밀하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보여주는 미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아이가 <후레자식>을 즐겨 보았다면, 아버지로서 함께 토론했어야 한다. 그게 옳은 길이다. 하지만 <후레자식>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콘텐츠의 자율규제는 창작자와 유통사, 이를 구독하는 수용자 간에 문제제기와 합의를 통해 그 선이 정해진다. 분노와 고소가 아닌 비판과 토론이 필요하다. 이번 이슈가  생산적 토론으로 나아가길 기대하고, 가능하다면 그런 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한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