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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출신의 1962년생 K씨가 1989년에 결혼한 후 아내와 신혼살림을 꾸민 곳은 강북 변두리 동네의 양옥집 이층이었다. 방 두 개에다 화장실과 부엌이 딸린 전셋집이었다. 자식들을 전부 다 출가시킨 1층의 집주인 노인 부부는 온화하고 친절한 성격이었다.

K씨가 수도권 신도시의 20평형대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은 가정을 꾸린 지 4년 뒤의 일이었다. 취업 이후 꾸준히 부어온 주택청약통장과 재형저축통장의 힘이 컸다. 이미 몇 차례 분양권 추첨에서 고배를 마신 K씨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채권액으로 적어 넣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떴다방에서 웃돈을 주고 분양권을 사야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그런데 다행히 운이 따라주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김영삼 정권은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원과 고위 공직자의 재산 공개를 단행했다. 언론은 연일 이들의 부동산 투기 사례들을 보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K씨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국회의원 Y씨의 부동산 취득 과정이었다. 1927년생으로 육사 1기 출신인 그는 12·12 군사반란의 주역으로 육군 제3군사령관, 안전기획부장 등을 거쳐 당시 국회 국방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Y의원은 군 장교 시절이던 1964년부터 세 아들의 명의로 서울 강남 일대의 땅을 매입했다. 맏아들에게는 13살이던 1964년 강남구 도곡동 대지 250평, 20살 되던 해인 1971년에는 경기 용인군 임야 286평을 사주었으며, 둘째 아들에게는 15살 때 강남구 대치동 대지 67평, 25살 때에 역삼동 대지 99평을 각각 사주었다. 막내에게도 14살 되던 해인 1969년 서울 대치동 대지 49평을 사주는 등 자식들 앞으로 ‘공평하게’ 땅을 구입했다. 부인 명의로는 1968년과 1977년에 강남구 대치동, 양재동 대지 142평을 사들이기도 했다.

K씨에게 Y의원의 사례는 원조 복부인의 전형적인 투기 행태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의 자산 증여 과정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나 다름없었다. 반면 신도시 아파트 입주는 또 다른 부동산 투기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줬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 이런 흐름의 사례들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1945년생 전문직 여성은 20년간 서울 압구정동 H아파트에서 살다가 평촌의 60평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녀가 신도시를 선택한 이유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서였다.

K씨는 이런 기사들을 읽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속으로 되뇌곤 했다. 과연 이들은 기존 보유 아파트를 팔고 신도시로 이주한 것일까, 아니면 전세를 내주고 그 보증금을 지렛대로 삼아 새 아파트를 구입한 것일까? 답은 뻔했다. 실제로 서울에 거주하던 50대 이상 중산층이 노후 대비나 증여를 위해 신도시의 대형 아파트를 구입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무렵, K씨는 ‘1920·30년대생 상류층의 부동산 투기·증여’와 ‘1940년대생 중산층의 2주택 마련’이라는 두 유형의 흐름을 분별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후자의 중산층이 전자의 상류층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고 있는 듯 보일 정도로 시간차를 두고 닮은꼴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후자의 1980·1990년대는 전자의 1970·1980년대와 매우 유사했던 것이다.

K씨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될수록 이전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욕망에 바짝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당시만 해도 집 한 채를 어깨 위에 짊어진 대졸 월급쟁이 가장이자, 군인 출신 대통령이 실행에 옮긴 주택 200만호 건설정책의 수혜자로서 가족의 삶이 부침 없이 평탄하기만 바라는 쪽이었다. 물론 K씨가 아직 모르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자신의 숨겨둔 욕망을 실현할 기회를 잡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외환위기가 부동산 시장을 뒤흔들어 놓기까지 3년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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