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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의도적으로 밖에 나가려고 한다. 집에서는 작업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 글 쓰는 것이 편하기는 하지만, 편하다는 이유로 몇 자 쓰다 말고 침대에 몸을 맡기기 일쑤다. 조금만 쉬다 다시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지만 뜻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행여 낮잠이라도 들게 되면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하루가 훌쩍 가 있다.

레이디경향DB

다음 주말까지 나는 아마 글 쓸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글 쓰는 몸을 만들고 글 쓰는 마음을 갖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해는 졌지만 나는 외출하기로 결심한다.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괜찮은 조명과 적당한 소음이 필요하다. 사람이 너무 많거나 없어도 작업에 몰두하기 힘들다. 사람이 많으면 주의가 분산되고, 사람이 없으면 내가 여기에 이렇게 오래 앉아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사람, 조명, 소음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면 단골 카페가 되기도 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또 발생한다. 단골 카페가 되는 순간, 처음처럼 집중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사이 카페가 너무 편해져서다. 카페의 분위기, 커피 맛, 자주 들리는 음악,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셈이다.

몇 주 동안 다른 데 있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는 또 길을 나선다. 나를 어색한 곳에 두기 위해, 낯선 환경에 노출시키기 위해. 편한 곳에서는 나도 모르게 안주하게 된다. 적당한 글을 쓰고 적당한 기쁨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내가 써낸 적당한 글을 읽으면 남부끄러워진다. 편한 것과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한다.

비단 환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치명적인 실수는 편한 사이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편하다는 이유로 자행되는 무수한 폭력들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농담이나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어떤 말과 행동은 당한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편한 사이는 보통 만들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서먹서먹한 상태를 건너뛰기 위해 그만큼 공도 많이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관계가 한번 편해지고 나면, 둘 사이를 끈끈하게 만들어준 추억이 반대로 상대의 발목을 잡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편해지게 된 데에는 추억을 함께 관통한 경험이 중요했을 텐데, 그 추억을 악의적으로 들추는 것은 편한 관계를 외려 거북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게 상대를 잘 알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도 알지만 상대가 싫어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잠정적인 가해자면서 피해자다. 적정 수준의 긴장, 거리, 예의를 갖춰놓지 않으면 편한 관계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편함을 포기해야 한다.

편함은 사고방식을 구태의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자라온 환경과 성장하며 누적된 경험은 그 사람을 구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어느 순간, 자신이 편하게 여기는 바대로 움직이고 자기도 모르게 그게 옳다고 철석같이 믿게 된다.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남자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공교롭게도 이런 것이었다. “나는 안 그래. 모든 남자가 그러는 것도 아니고.” 살아온 방식이 삶이 된 나머지, 일단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또다시 상대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이처럼 너무 편하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들여다보지 못한다. 자기가 지금껏 보고 들은 게 전부인 줄 안다. 불편한 뉴스는 애써 멀리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 정보만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럴수록 자신이 몸담은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사고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편함이 편협함과 무지를 낳게 되는 것이다.

올봄부터 ‘낯선 대학’이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순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강의를 하는 곳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 공연을 하는 사람, 그것을 기획하는 사람, 노래를 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서비스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 등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도 있고 겹치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다. 아직까지는 적당한 낯섦과 어색함,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기분 좋은 긴장이 있다. 낯선 대학에 다녀올 때마다 앞으로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편하다’의 반대말에는 ‘불편하다’만 있는 게 아니다. ‘편하다’의 반대편에는 ‘새롭다’도 있다. 나를 들뜨게 할지도 모를,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게 해줄지도 모를 가능성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꺼이 편함을 포기한다. 익숙함을 포기한 대신, 새로운 눈으로 여기를 바라볼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다. 어딘가 편하지 않다는 것은 긴장한다는 것이고, 그 긴장은 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하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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