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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영화 장르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 직후 수업에서 다룰 장르는 필름누아르(이하 누아르)였다. 그런데 마음을 다잡고 수업을 준비하려고 노력할수록 나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이 이 사회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방식과 고전적인 누아르 영화들이 선보이는 이야기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도시를 살아가는 고독한 남자. 어느 날 그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를 만나 유혹에 빠진다. 그는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살인조차 불사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들을 이용하고 버리기를 반복해 온 ‘먹튀녀(팜므파탈)’일 뿐이다. 남자는 혼란 속에서 불안증과 망상증에 시달리다 결국 그녀를 죽인다. 복수이자, 응징이다. 누아르의 대표작이자 이후 누아르 서사에 원형을 제공한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1944)의 내용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남자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남자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펼쳐질 뿐만 아니라, 카메라 역시 남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를 살짝 바꿔보자.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이 존재 양식이 된 서울. 남자는 목사가 되고 싶어 신학을 공부했지만 세상은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그의 삶은 고독했고, 여자들은 그를 무시했다. 결국 그는 강남역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 숨어 들어가 한 시간 반을 기다려 자신과 전혀 무관한 한 여자를 살해한다. 자신을 무시한 여성 전반에 대한 복수이자 응징이다. 사회는 이것을 ‘조현병에 시달리는 한 기층 남성의 돌출적 행동’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는 의외로 설득력을 가진다.
더 이상 유토피아를 꿈꿀 수 없는 사회, 남성의 불안, 여성에 대한 분노, 살인 그리고 정신질환이라는 변명. 70년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한국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 하나는 영화이고 하나는 사회적 사건이라 같이 놓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터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한 사회의 여성혐오란 영화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허구에 기반을 둔 이미지 정치에 불과하다. 여성혐오에는 실체가 없다. 한편으로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는 이런 왜곡된 재현을 통해 여성혐오 문화를 정당화하고 자연화한다.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_경향DB
1940년대 중반에서 1950년대 말까지 관객을 사로잡았던 누아르는 2차 대전 후 미국의 불안과 좌절을 예민하게 잡아내면서, 한 사회의 방향 상실감과 감정적 소요를 드러내는 데 있어 탁월한 장르라고 평가받았다. 누아르는 또 베트남전 패전과 반문화 운동의 영향 속에서 1970년대 ‘네오 누아르’로 미국 사회에 다시 돌아온다. <차이나타운>, <택시 드라이버>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사회의 불안을 언제나 남성의 불안으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그 원인으로 여성의 존재가 지목되어 그를 응징함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려는 것. 이는 여성혐오 문화의 일면이기도 하다. 한 수업에서 누아르의 여성혐오적 성격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누아르란 전후 남성들의 불안을 다룬 장르 아닌가요? 여성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투덜거릴 순 없죠.” 그렇다면 1950년대 여성의 정서를 반영했던 대표적인 장르인 멜로드라마를 한번 살펴보자. 누아르에서 남성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 ‘요물스러운 여성’이었던 반면, 멜로드라마에서 여성을 위협하는 것은 대체로 공동체 윤리이거나 규범, 가부장제 구조 그 자체였다. 멜로드라마는 남성혐오를 재현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러나 누아르와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 사이의 유사성은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또 한 가지 공통점은 바로 장애혐오다. 언급했던 것처럼 누아르는 남성 몰락의 원인을 1차로 여성에게 돌리고, 2차로 그의 정신질환에서 찾는다. 정신장애는 언제나 ‘정상 남성’의 결핍이자 근본적으로 그를 해치는 원인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이런 장애혐오가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국가와 공권력은 별 어려움 없이 장애혐오를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었고, 대중은 이를 쉽게 납득했다.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의 전개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장애혐오를 목격하면서, 나는 대중문화에서의 장애재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예컨대 누아르에서도 ‘팜므파탈’만 문제 삼았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남성 캐릭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관점에 성(性)이 개입된 것은 서구 페미니즘 안에서는 적어도 50년, 한국 페미니즘 안에서는 30년은 된 일이다. 그러나 ‘장애’를 문화분석의 방법론이자 관점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는 아직 낯설다. 물론 이는 나의 무지 탓일 수 있지만, 불행히도 이런 무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엔 공부가 필요하다. 장애학을 도입하면 대중문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비장애인 중심적인지 드러나기 시작할 터다.
여성의 관점에서만큼이나, 장애의 관점에서도 이야기는 다시 쓰여야 한다. 그리고 이 둘은 분리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교훈 중 하나일 것이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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