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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침대에 몸을 재보고, 안 맞으면 잡아 늘이거나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흉측한 괴물이나 범죄자의 이야기로만 여겼다. 그런데 가끔 내 안에도 그런 침대 같은 것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수록 마뜩잖은 일, 마뜩잖은 사람이 생기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에 부아가 날 때. 이건 아집이 아니라 ‘나의 올바름’과 그렇지 않은 것의 대립이라고 생각하며 내 안의 침대가 타자를 잔혹하게 잘라버리곤 할 때. 그러나 오늘처럼 공평무사하게 비가 내리면 어쩌면 나는 반드시 옳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잔뜩 우울해지곤 한다.

내가 꼭 옳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 나의 생각은 사심이 아니고 합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근거는?

‘중식이 밴드’는 한때 내가 열광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밴드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니’ ‘여기 사람이 있어’와 같은 우리 시대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노래가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식’을 마음에 새긴 것은 <나는 중식이다>라는 단편영화를 보면서이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지금껏 남만 보고 살았다. 남의 실수만 보였고, 나의 실수는 이해해주길 바랐다. 남만 탓했다. 나에겐 뭔가 있을 거야. 남과 다른 뭔가가 있어. … 없다. 그런 생각은 나 이외에는 모두를 무시하는 생각이다. 없어, 그런 거. 만약 있다면 왜 나는 있지? 그건 불공평해.”

내가 옳아, 나는 다른 사람보다 공정해, 그런 생각은 남들을 무시하는 생각이다. 나도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데 어떻게 나만 중립적이고 타당할 수 있을까. 그것은 허상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나에게 없는 어떤 것을 욕망하고 동경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늘 나와 직접적으로 무관한 경우일 때만 그렇다. 실제는 나와 다른 것을 조금도 못 참는다. 그것은 내가 늘 불만스러워하는 나의 단점에도 해당된다. 우리는 자신의 나쁜 점을 싫어하고 바꾸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무의식에서는 그 단점까지 옹호하다 못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녀관계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나와 다른 것 때문에 좋아해서 사귀지만 차츰 나와 다른 면을 알게 되면, 처음의 ‘너 없이 못 살겠다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다’가 되기 쉽다. 이런 비극적 사실을 도스토옙스키 같은 대가는 “사람은 추상적인 인간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성찰한 바 있지 않은가.


심상정 대표(왼쪽에서 세번째)가 29일 국회에서 4인조 ‘중식이밴드’와 총선 TV광고용 영상 및 공식 테마송 협약식을 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_연합스


그래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일과 무관한,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작은 ‘밴드들, 페친들, 이웃들’에게만 대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광장이 아니라 광장처럼 보이는 밀실들 아닌가. 우리끼리만 ‘좋아요’로 혹은 기이한 적개심과 공격으로 뭉친 다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아니라, 또 다른 공론장의 무덤 아닌가.

데리다의 오이디푸스 해석에 따르면, 오이디푸스의 몰락은 “하나는 하나이지 다수가 아니다”라는 합리적 산술의 붕괴이자 몰락이다. 즉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테베의 왕이고 옆집 나라 국왕의 아들이고 아내의 남편이고 자식들의 아버지인 줄만 알았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이자 어머니와 결혼하여 근친상간의 자식을 둔 아버지임을 몰랐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셋이면서 넷인 것은?”이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정확히 그러한 인간의 무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고 곧 너이다’라는 답은 인간, 사자, 새의 모습을 한 스핑크스 자신처럼 인간 또한 오염되어 있는 존재이자 복수적 형상이라는 것.


소통의 기술이 발달하고 다원화 시대가 열렸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혐오문화와 적대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보편적 가치와 의미의 상실, 개인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데리다의 지적처럼 인간은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복수적이며 지극히 오염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나는 여성이지만, 내 안에는 남성도 있고 분열과 장애, 동성애와 ‘개저씨’를 품고 있는 존재이자 외국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들과 현실적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둘러보면 내가 싫어하는 그들은 아빠, 엄마, 친구, 애인, 선생, 동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인종청소하듯 나와 다른 것들을 싹 잘라버리면 안되는 이유? 그것은 무엇보다 억압되거나 배제된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강력한 괴물이나 유령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령 수많은 이슬람 테러리스트처럼, 올랜도의 범죄자처럼, 강남역의 살인자처럼, 매년 돌아오는 효순과 미선처럼, 대한민국 국민의 무의식에 들러붙은 세월호의 아이들처럼. 추방과 배제, 혐오와 적대가 아닌, 공존과 관용의 길을 함께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군가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말은 사실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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