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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는 부쩍부쩍 다가오는데 변변한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수뇌부는 그러거나 말거나 연일 보수결집에 여념이 없다. 후보라도 제대로 내놓고 보수 유권자를 결집한다면 이해라도 되지만, 변변한 후보도 없는데 결집만 열심히 하니 진짜 목적은 지방선거가 아니라 딴  데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이러한 결집의 방법은 애처롭게도 하나같이 철 지난 레퍼토리들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보수세력이나 특정 지역을 말려 죽이려고 한다는 유언비어성 협박,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종북좌파 소굴이라는 색깔론. 그중에서도 백미는 지난 3월 말에 발족한 ‘사회주의 개헌저지 투쟁위원회’이다. 사회주의 개헌이라니, 안될 일 아니겠는가. 반드시 저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이 위원회는 아직까지 특별한 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회주의 개헌을 저지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시사 2판4판]마이너스의 손 (출처:경향신문DB)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 추억. 요즘도 어른들이 그런 짓궂은 장난을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예전에 걸핏하면 어린아이들 울음보를 터뜨리던 난감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코웃음치고 넘어가면 될 어리석은 질문에 순진한 아이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은 울음보를 터뜨렸고, 어른들은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어차피 그 질문에 답을 듣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재미만 있으면 되니까.

다시 개헌 이야기로 돌아오자. 필자도 가급적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국회가 발의해야 하는데, 국회는 개헌특위만 만들어놓고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개헌은 오랫동안 대다수 국민과 시민사회, 전문가들이 그 필요성을 지적해왔고, 지난 대선에서 모든 주요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약속한 사항이기도 했다. 그런데 국회는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러면 대통령이라도 최소한 시도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문 대통령은 새 헌법이 ‘국민헌법’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국민헌법자문특위를 설치했고, 특위는 국민들의 의견을 방대하게 청취했다. 홈페이지 방문 및 의견 제시 52만, 안건 제시 1127건, 16개 시·도 지역순회 간담회, 유관 학계와 시민사회 의견 수렴, 2000명 규모의 전 국민 여론조사, 전국 4대 권역에서 800명이 참여한 숙의형 시민토론회, 160명이 참여한 청소년·청년 토론회가 그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숙의형 시민토론회이다. 길 가는 시민을 붙잡고 물어본다고 가정하자. 대통령중심제,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중 무엇을 선호하십니까? 세 가지 대표적 정부 형태의 특징과 장단점이 무엇이고 그것이 한국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답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 꼴이다. 숙의형 시민토론회에서는 개헌의 주요 쟁점별로 상반된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이 나서서 자신이 지지하는 개헌의 방향을 말하고 그 근거를 설명했다. 시민들은 그 설명을 듣고 스스로 토론했으며, 토론이 모두 끝난 후에 의제별로 자신들의 의견을 결정했다. 생각의 근거를 가지게 된 시민들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옳다면 기꺼이 바꿨다.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 개헌안 발의 후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총리의 국회 선출 여부이다. 토론 이전에는 국회 선출 반대가 48.3%(찬성은 40.2%)였는데, 토론 이후에는 반대가 68.3%(찬성은 24.1%)로 달라졌다. 개헌안 마련에 적극 참여한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토론회에 만족했다는 응답은 권역별로 97~99%였고, 이런 기회가 마련된다면 또 참여하고 싶다는 응답도 권역별로 모두 95%를 넘었다.

이렇게 마련된 개헌안을 자유한국당은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부르고 있다. 며칠 전 홍준표 대표가 박근혜 피고인을 ‘공주’라고 부른 것을 보니 그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왕’으로 대접하는 모양이다. 막상 그 왕께서는 순전히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총칼로 개헌을 단행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아무것도 안 해놓고, 헌정사상 최초로 방대한 국민이 참여하고, 그렇게 참여한 국민의 97% 이상이 만족한 토론을 거쳐 만들어진 헌법안을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국민을, 특히 보수성향 국민의 수준을 뭘로 보기에 이런 말장난을 할 용기가 나는 걸까. 어쨌든 자유한국당이 정색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론 예전 어른들처럼, 대답이 중요한 건 아닐 거다. 나라야 어찌 되건, 그들은 살길만 찾으면 되니까.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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