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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죠?” 한 30대 여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잘생겼잖아요. 신사적이고요.”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를 외모나 매너로 결정하다니,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헛짚었다. 이 여성은 10년 이상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 참여를 이끌어온 현직 활동가이다. 정치의식이라면 평균적인 한국인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는 꾸미지 않은 대답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가 바뀌고 있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장기간 지속될 각인인지 아직은 분명치 않으나, 외국 여러 나라의  사례들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로널드 잉글하트가 1977년에 이미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고 불렀던, 근본적인 가치관 변화의 한 부분이다. 경제성장은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일자리의 구조가 달라지고, 문화가 바뀌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고, 가족의 구조가 변하고, 성역할의 고정관념이 사라진다. 이 변화는 크게 보아서는 물질주의 가치관에서 탈물질주의 가치관으로의 변화이다. 안보, 성장, 국가를 가장 중시하는 가치관에서 인권, 자유, 개인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앞의 것이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라면 뒤의 것은 충분조건이다. 앞의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 도입을 위한 환경요건이라면 뒤의 것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미시적 기반이다.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자라나는 세대를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되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자 환경요건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은 모든 사람이 인권과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다. 그러니 탈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자 미시적 기반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꾸준히 높지만, 그중에서도 성별·세대별로 높은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이다. 정부의 각종 개혁·평화 정책에 대한 지지도 똑같은 패턴을 보인다. 지난 칼럼(‘젠더 정치의 등장’ 3월13일자)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20대 내부에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현상)은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근접한다.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견해차가 대구·경북과 광주·전라만큼 커졌다는 말이다.

앞에 소개한 대화를 보고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남성 위주의 정치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40대 남성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던진다는 생각도 한때는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문 대통령은 도도하게 흘러온 민주화의 역사를 마침내 완성시키는 남성적 거시담론의 영웅일 수 있다. 반면 20대 여성은 ‘신사적’이라는 말 속에 드러나듯이 여성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듯한 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할 수 있다.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외모나 매너 때문에 지지하는 ‘생각 없는’ 지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민주주의이다. 20대 여성들이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반’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대통령 지지율은 ‘몇 퍼센트’라는 하나의 숫자로 나타나지만, 여성의 문재인과 남성의 문재인은 다르다.

한국보다 20~30년 앞서서 정치적 젠더 갭을 경험했던 외국의 사례들을 보자. 전통적으로는 여성의 정치활동 참여가 남성보다 낮고 더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일정 단계에 이르면 젠더 간 정치적 견해차가 없어지는 ‘해체(dealignment)’ 현상이 나타나고, 그 단계를 지나면 여성이 남성보다 진보적으로 변하는 ‘재정렬(realignment)’이 이루어진다. 적어도 선진산업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들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유리천장의 완전한 해체 요구이다. 한국만이 세계사의 유일한 예외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를 영원히 바꾸어놓을 것이다.

안보와 성장에만 의존해 살아온 보수야당이 이런 변화에 맞춰 혁신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가 젊은 여성들이 요구하는 가치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상태를 바꾸지 못하면 끝장이다. 외국의 경험을 보면, 미시적 차원에서 한번 진보화한 여성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여당에는 운동권의 거대담론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미시적인 일상의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과제가 있다. 한국 정치에서 ‘남자의 문재인’뿐 아니라 ‘여자의 문재인’이 정당한 대접을 받게 해주지 못한다면 지금의 ‘여당(與黨) 지지’는 ‘여당(女黨) 창당’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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