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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의 일이다. 바로 인접 학과에는 노벨상을 수상한 유명한 교수가 가르치고 있었다. 그분의 강의가 어떤지 궁금해져서 그 학과 학생에게 물었다. “그 과목은 제도(institution)지.”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에는 많은 뜻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 학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야 하는 과목, 그 과목이 필수라면 다른 과목은 선택, 그 과목에서 가르치는 이론이 토대라면 다른 이론은 응용, 이런 것들 말이다. 제도란 그런 것이다.

지난 2주간 경향신문 지면에는 흥미로운 토론이 이어졌다. 시작은 1월4일자에 실린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대표의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라는 글이었다. 역사적으로 항상 주류였던 한국의 보수우위 시대가 지나가고 정당으로 치면 ‘민주당 대 반민주당’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유권자 지형을 진보부터 보수까지 30 대 20 대 30 대 20의 네 집단으로 구분하는데, 보수정당은 선거 때마다 왼쪽에서부터 시작해 조금씩 유권자 지지를 빼앗기다가 마침내 탄핵과 2017년 대선에서는 중도보수라고 할 세 번째 30%마저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리한 정치적 입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할 경우 세 번째 30%의 대안이 될 가능성, 그리고 자유한국당 내부의 폐쇄성을 보면 가까운 시일 안에 보수의 시대를 다시 보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며칠 후 정용인 기자는 “386세대의 주류 등극으로 한국 민주화는 완성됐을까”라는 기사를 내놓았다. 그도 역시 위에 언급한 박 대표의 글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그의 문제제기는 단순하고 그래서 힘이 있다.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나기 이전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보수세력에만 유리하게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을 걱정해왔고, 보수의 장기집권을 우려해왔다.

그런데 불과 1~2년 만에 보수가 궤멸하고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분석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구체적으로 ‘그 시절’을 경험한 독특한 세대적 연대를 가진 386세대가 주류로 등극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며, 정 기자가 이전부터 주장해오던 ‘장기 386시대’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과연 한국의 주인은 바뀌고 장기 386시대는 현실이 될까? 핵심은 문재인이라는 개인을 빼놓고 생각했을 때 앞선 모든 전망들이 그대로 성립하느냐에 달렸다. 임기가 끝나고 문 대통령이 퇴장했을 때, 45%를 넘나드는 지금의 민주당 지지율은 유지될까? 정권의 핵심 포스트를 채운 386은 문재인이라는 개인이 없이도 시대정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 질문들에 쉽게 ‘그렇다’고 답하려 한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 세상이 바뀌기 이전에는 왜 그리도 ‘기울어진 운동장’과 ‘보수의 장기 집권’을 걱정했었는지 함께 답해야 한다.

보수의 자멸이나 386의 대안이 될 세대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가 제도로 남아야 한다. 영원할 것 같던 보수집권도 9년 만에 끝났다. 민주당 정부가 5년을 갈지, 10년을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놓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문재인 없이도 더 좋은 세상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으려면 좋은 변화들을 제도로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인적 청산도 중요하겠지만, 케인스의 말처럼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는 죽고 없을 것이다. 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그 사회의 움직일 수 없는 ‘상수’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에 성공한다면 한국의 주인은 바뀔 것이고 386은 역사를 바꾼 사람들로 기록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한때의 출세주의자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개헌, 선거법 개정, 국정원·검찰 개혁 같은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장 딱한 것은 자유한국당이다. 의석 116석에 지지율 20% 미만. 유일하게 가진 것이라곤 비토권밖에 없다. 그 비토권이 유지되는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다음 총선까지 2년 남짓이다. 6월 지방선거에서 대패하기라도 한다면 더 일찍 비토권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과 비슷한 121석을 가지고 비토권에 의지해 버텨냈던 17대 국회의 추억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 지금의 자유한국당에는 박근혜가 없고, 지금의 자유한국당은 그 당시 한나라당보다 훨씬 폐쇄적이다. 건강한 보수정당의 등장을 바라는 입장에서, 새로운 제도를 써내려가는 데에 적극 참여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나은 전략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첨예한 전쟁이다. 비토만 하다가 새로운 제도가 정해지고 나면 아주 긴 시간 동안 주류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 386에나 보수정치세력에나, 제도화는 전쟁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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