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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민담은 없다. 어른들은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원초적인 폭력과 성을 할 수 있는 한 순치한 뒤 듣기와 말하기 교육에, 또는 즐거운 놀이용으로 활용할 뿐이다.

어린이를 위한 우화도 없다. 인간 사회를 동물에 빗대 꼬집은 이야기가 우화다. 인간 사회와 세상의 인심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가는 어린이가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른이라면 이야기의 너머를 보아야 할 터이다. 민담의 끔찍함을 많이 지닌 우화로 <토끼전>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용왕의 발병이다. 용왕은 성적인 향락과 술에 빠져 몇날 며칠을 내리 놀다가 덜컥 죽을병에 걸린다. 용왕이 평소 굽신대던 고위 관리들에게 자신을 살릴 방법을 물었지만 이런 소리나 할 뿐이다. “어쩌나?” “어쩐담!” “좋은 수 있나?” “별수가 있나!” 그리고 다른 얘기는 다 아는 얘기 너머에 있다.

“별수가 있나”가 전부인 한림학사 깔따구, 간의대부 모치는 각각 이부상서 농어, 병부상서의 자식이다. 무능한 자들이 아비 덕분에 그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는 용궁이다. 아무 의견이 없으므로 적이 없는 쏘가리가 용왕의 자문역이었다. 대대로 6품 벼슬을 넘지 못한 자라는 미치도록 출세하고 싶었다. 고래도 벌떡게도 메기도 도미도 못 오를 길에 기어코 자라가 나선 데에는 이번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간절해서 뭍에 오른 자라는 토끼의 자취를 쫓다가 범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산속의 회의를 엿보게 된다.

산속 회의는 용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와 닮은 데가 많았다. 회의는 노루, 너구리, 멧돼지의 나이 다툼으로 처음부터 엉망이었다.

사람이 농토를 넓히느라 개간이 이어져 산속이 잠식되니 살 곳이 없다고, 나날이 사냥이 극성이니 살길을 찾자고 회의가 열렸는데, 그 개시가 연장자 다툼이었다. 간신히 진정하고 나서 사냥꾼도 사냥꾼이지만 사냥개부터 해치우자는 보잘것없는 짐승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산속의 왕 범은 꼬리를 내렸다. “사냥개 뒤에는 일등 포수가 있다. 잘못 건드렸다가 포수의 총에서 번쩍 불꽃이 튀는 순간 내 신세가 어찌 되겠는가?” 그러고도 간식은 필요했다. 범이 허기질 무렵 여우가 다람쥐가 모아 놓은 밤과 도토리를 들추었다.

다람쥐는 여우한테 대들 완력도 용기도 없었다. 다람쥐는 분풀이로 저보다 못한 쥐를 잡았다. 쥐가 모아 둔 양식을 털어 바쳤다. 그러나 범은 고기가 먹고 싶었다. 다시 여우가 나섰다. “멧돼지 새끼 큰놈이 사람 시장에 나가면 열 냥짜리입니다. 멧돼지 새끼 팔아 열 냥어치 맛난 거 사 드십시오.”

농장을 지배하는 동물이 힘없는 동포 동물을 인간에게 팔아먹는 장면이 나오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방불하다. 멧돼지가 땅바닥에 박힌 사금파리를 입에 넣고 으득으득 씹으며 어쩔 줄을 모르는데 기어코 여우가 한마디 덧붙인다. “나처럼 세상 살면 아무 걱정 없지. 어디를 가도 제일 힘센 놈 비위만 맞추면 일평생 편치. 남한테 거저 묻어가지.”

금수저 깔따구, 모치 대신에 가 본 적도 없는 뭍에서 본 적도 없는 토끼를 쫓는 것은 신분의 원한을 품은 자라였다. 아비한테 물려받은 흙수저를 입에 문 자라였다. 엉망인 산속에서 다람쥐는 저만 못한 쥐에게 제 억울함을 넘겨씌웠다. 산중의 임금이라지만 사냥꾼 무서워 사냥개를 못 쫓는 범에게, 멧돼지는 자식을 빼앗기고도 대들지 않거나 대들지 못했다. 제게 엄니가 있음을 잊고 사는 모양이다. 이 모습을 비웃으며 악마적인 쾌감을 느끼는 하수인이 존재한다. 누구보다 얄밉고, 누구보다 밉살맞다.

뱅 돌아 오늘이다. 뱅 돌아 우리 앞이다.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의 “밥하는 아줌마” 망언을 옹호하는 단체의 기자회견이 같은 당 장정숙 의원의 주선으로 열렸단다. 용왕이나 범을 염두에 둔 기자회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 낀 분 가운데 인간세계에서 깔따구나 모치 같은 복을 누리고 사는 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아줌마가 어때서”가 울려 퍼진 모양이다. 여우는 아주 분명히 보인다. 산속 회의는 곰의 한마디로 닫혔다. 곰은 이렇게 외쳤다. “여우 놈의 웃음소리 뼈 저려 못 듣겠다. 그만 집어치우자.”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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