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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는 ‘전속 DJ’가 하나 생겼다. DJ의 이름은 애플 뮤직의 ‘For you’. 매일 ‘월요일의 재생 목록’이나 ‘수요일의 앨범’처럼 각각 다른 재생 목록과 앨범을 새롭게 제공하는 것은 물론 최근 재생한 음악과 즐겨 듣는 음악, 내가 들었던 음악과 비슷한 음악까지 추천해주는 똑똑한 DJ다. 2주쯤 지나자 나만을 위한 새로운 음악 믹스를 만들어 추천해주기 시작하는데 ‘취저’(취향 저격) 그 자체다. 임의 재생 한 번만 눌러놓으면 알아서 이것저것 틀어주니 편하기까지 하다.
언제부턴가 익숙한 음악만 듣던 나에게 애플 뮤직은 나조차 모르겠던 내 취향을 파악해 새로운 음악들을 선물하는 중이다. 끝말잇기 하자고 말을 걸면 “좋아요, 제가 먼저 시작할게요” 한 후 냉큼 “해질 녘” 혹은 “꽃무늬”를 해버려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는 시리(Siri)만큼이나 영리하다고나 할까. 그동안 빅데이터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용을 꺼려 왔지만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음악을 골라 대령하는 이 DJ의 실력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좋아하던 음악도 듣고 싶고 새로운 음악도 탐색해보고 싶은 내 욕심을 채워주는 데 그만이다. 요즘은 LP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발견한 터, 똑같은 음악이라도 기기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언제부터인가 종이책과 전자책을 번갈아 읽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책을 읽게 됐던 것과 비슷하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나 종종 골탕을 먹는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바로 확인 가능한 데다 내용 검색마저 가능하니 자료 찾기도 편하고, 여행을 떠났을 때도 짐 무게 걱정할 필요 없으니 편리함 그 자체다. 사실 효율성만 따지면 종이책이나 음반은 옳은 선택이 아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짐을 늘리는 데에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뭔가를 사들이고 쟁여놓는 행위 자체가 부담인 것은 맞다. 하지만 “책은 사서 바로 읽는 게 아니라, 사놓은 책을 언젠가 읽게 되는 것”이라는 작가 강창래의 말대로 손 가는 데, 보이는 데에 책이 있어야 읽기 마련이다. 전자책으로는 누릴 수 없는 우연의 즐거움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애플 뮤직의 DJ가 아무리 똑똑해도 라이브 공연의 현장감을 능가하기란 어렵다. 며칠 전 재즈 클럽 버텀라인에서 신촌블루스 엄인호의 공연을 봤다. 작은 공간을 꽉 채운 관객들의 기대감만으로도 후끈했는데, 관객을 휘어잡는 거장의 무대에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공연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사람들은 음악과 알코올에 취해 떼창을 해댔고, 관객의 열기와 흥분을 고스란히 받은 뮤지션들의 화답으로 여름밤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두 곡의 앙코르를 마지막으로 두 시간여의 공연이 끝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 많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버린 것이다. 의자 하나가 간절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어 있는 의자들만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오히려 엄인호 선생님이 자리를 뜨지 않고 관객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연 중간에 “공연을 즐기기 위해 가장 좋은 건 술을 주문하는 것입니다”라는 인상적인 코멘트를 남긴 뒤였다. 술이라도 한 잔 더 팔아주는 것이 이런 무대를 만들어준 공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지속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거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썰물처럼 클럽을 빠져나가던 관객들이 더 아쉬웠다. 입장료를 냈으니 그것으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공연 보러 와서 잘 놀고 앙코르곡도 들었고, 공연이 끝났으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왠지 헛헛했다고나 할까. 백발 성성한 노장의 라이브 공연이라는 ‘아날로그’를 ‘디지털’적 방식으로 끝내버린 그날의 마무리가 아쉬움으로 남은 이유다.
음악 감상이든 독서든 시대에 맞춰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아날로그 특유의 감성만큼은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좀 촌스럽고 비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아날로그의 반격>이란 제목의 책을 전자책으로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한 아이러니는 어찌해야 할까? 당분간 나는 음악이든 책이든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 갈지(之)자 행보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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