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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최순실 일당’에 대한 공소장에 등장하는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이 지난 20일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미 대통령이 10대 그룹을 만나고 안종범 전 수석이 전경련과 300억원 규모로 출연하기로 합의한 상황에서 실무적으로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 회의를 했을 뿐”이라며 “재단 규모나 참여 기업 결정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공소장을 보면 그의 해명대로 최 차관 이름은 미르재단 설립과 관련해 지난해 10월21~24일 열린 실무 회의 부분에만 나온다.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최 차관은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의 지휘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실무 회의에서 최 차관은 “10월 말로 예정된 리커창 중국 총리의 방한에 맞춰 300억원 규모의 문화재단을 설립해야 하고 출연하는 기업은 삼성, 현대차, SK, LG, GS, 한화, 한진, 두산, CJ 등 9개 그룹이다” “아직까지도 출연금 약정서를 내지 않은 그룹이 있느냐. 그 명단을 달라”며 지시·독촉한 것으로 공소장에 나온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이 5일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최상목 1차관(오른쪽)과 함께 답변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들과 단독 면담을 갖고 돈을 요구한 사실도, 뜬금없이 중국 총리의 방한 일정이 거론된 게 실은 기업들 출연이 지연되자 최순실씨가 때마침 예정된 외교일정까지 들먹이며 독촉 명분으로 삼은 것이라는 사실도, 기업들의 미르재단 출연금 규모가 3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갑자기 불어난 것도 전혀 모른 채 그저 직속 상관이 “지시한 대로” 실무를 봤을 뿐이라는 게 최 차관의 해명이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최 차관은 박근혜·최순실 주연의 블록버스터급 막장드라마에 ‘지나가는 사람 5’쯤 되는 단역배우 역할을 한 셈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맥락이나 앞뒤 정황도 모른 채 기업들에서 수백억원의 돈을 받아내는 일을 기계적이고 맹목적으로 처리해버린 이 고위관료에게 그가 생각하는 ‘국익’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만약 자신이 처리한 ‘실무’가 거대한 범죄행위의 일환이었다는 걸 당시에 알았다면 거부하고 맞서 싸울 수 있었을지도 묻고 싶다. 공손하고 침착한 톤으로 해명을 한 최 차관과의 통화를 마친 후 집에 가는 길 내내, 영혼 없는 엘리트 관료의 전형을 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경제부 | 이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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