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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려고 앉았더니 더위가 문제다. 실상은 시를 쓰고 있으면서 왜 그림을 그린다 하는가? 다른 행동을 하는 다른 인물을 써내면서 자판 앞에 앉은 자신을 지우려 함인가? 아니면 그림을 그리듯, 이라는 말처럼 시쓰기에 대한 일종의 비유로 이런 말을 하는가? 지우려 지우려 해도 끈질기게 거기 버티고 있는 자 누구인가? 그림 그리는 자들도 자신을 그림 속 주연으로 그려넣곤 하는가? 이를 테면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 속에 들라크루아 자신을 그려넣기, 아니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는 수많은 감독들, 앨프리드 히치콕, 로만 폴란스키, 마틴 스코세이지, 우디 앨런, 쿠엔틴 타란티노, 박찬욱, 봉준호까지도! 이때 끈질기게 이들을 촬영하는 자 누구인가? 거기 절대적인 시선, 누구인가? 역시나 더위가 문제다. 그림을 그려야 할 판에 이런 답도 없는 질문들을 시키는 게 바로 말복 더위다. 그치만 거기, 문 틈새로 또 나를 지켜보는 자 누구인가, 느낄 수만 있고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그 시선은 누구의 것인가. 더위처럼 내리쬔다 더위처럼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이 빌어먹을 것 그러나 그것은 실상 나의 시선이다, 하는 시시한 결말이 아니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역으로 겨눌 수 없는, 저 빌어먹을 것!

박승열(1993~)


시인은 시 ‘배두나’에서 배우인 두나와 현실의 두나 그리고 여럿의 두나에고(ego)를 통해 어느 것이 진짜 두나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에고는 내 주변의 세계와 시공간에서 분리된 개체로서의 나를 의미한다. 시인은 배두나를 통해 영화가 현실인지, 현실이 영화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을 그려낸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시를 쓰고 있으면서 왜 그림을 그린다 하는가?”부터 “나를 지켜보는 자 누구인가”까지. 시와 그림의 혼돈, 그림 속의 화가, 연기를 하는 영화감독 등은 시인의 “절대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모든 건 시 속에 존재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의 상태는 말복 더위로 혼란스럽다. 불볕더위가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런 상태에서도 시인은 “역으로 겨눌 수 없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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