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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토록 요란하던 빛이 어둠한테 지고, 세상의 모든 사물도 웅크린 짐승처럼 하나로 묶이기 시작하는 저녁이다. 이 하루도 함께 지냈다고, 물먹는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김종삼). 저물다는 말이 참 좋다. 날이 저문다, 라고 말하면 고단했던 하루가 묵직하게 섬돌 아래로 내려앉는 것 같다. 사방에서는 꽃도 이미 열매로 저물어 버렸다.

서두르긴 했지만 조령산 깃대봉에 올랐다가 새재 뒤편으로 내려올 땐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경사스러운 소식을 전해준다는 문경의 단풍이 몹시 푸짐했다. 아찔하기도 하지만 무섭도록 아름다운 바위들. 그 한쪽엔 불리한 조건을 딛고 일어선 꽃들이 있다. 참으로 갸륵하게 끌어모은 흙무더기마다 꽃이 꽂혀 있다. 저물어가는 이 계절을 담당하는 가는잎향유다. 꽃은 한두 송이가 아니라 길 떠나는 가족처럼 우르르 떼지어 피었다. 모든 꽃들이 훌쩍 사라진 때, 조금 고즈넉한 곳에서 가는잎향유를 보는데 옛 생각이 났다.

어린 시절, 마지막 수업종이 울리면 필통과 공책을 부리나케 책보에 쌌다. 오늘은 우리 동네 ‘회치’가 있는 날이다. 마을 뒷산의 큰 느티나무 그늘에 어른들이 솥을 걸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커다란 바위인 ‘내리방석’에서 돼지를 굴러 떨어뜨린다고 했다. 송아지처럼 씩씩거리고 할아버지한테 달려가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벌렸다가 채 씹지도 않은 채 넘긴 돼지고기 몇 점. 굵은 소금에 찍지 않아도 단맛이 펄펄 입안에서 장구를 쳤다. 지나간 일은 지금으로부터 옛날로 멀어진 게 아니었다. 앞에서부터 이렇게 불시에 찾아든다. 아직도 안 잊히는 그날의 술렁술렁한 풍경들.

‘가는잎’은 잎이 어디로 간다는 건 아니고 그야말로 가늘다는 뜻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저물어가는 가을에 가는잎향유를 만나려니 그런 뜻만 실리는 건 아니었다. 봄이라는 글자에는 꽃을 보라는 의미가 들어 있고, 가을에는 어디로 간다는 동작이 마음껏 포함되어 있는 것. 올해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 가을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흔들리는 가는잎향유 앞에서 송아지처럼 느리고 길게 울고 싶어졌다. 가는잎향유, 꿀풀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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