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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원래 이렇게 푸르렀는지 자꾸 쳐다보게 만드는 가을이다. 늦여름 태풍이 지나가고 찬 대륙풍이 불어오면서 지상의 먼지와 수증기가 줄어들어 생기는 자연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테지만, 유독 더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코로나 팬데믹의 고통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도 든다. 아무튼 누군가 그리워해야 할 것 같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이다.

하늘을 뜻하는 한자는 천(天) 이외에도 여럿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이 있고, 땅을 덮은 지붕이라는 뜻에서 우(宇), 개(蓋) 등의 글자도 하늘의 의미로 사용된다. 둥글게 보여서 궁(穹), 원()을 쓰기도 했고, 텅 비어 있어서 공(空), 허(虛), 신비하게 검고 어두워서 현(玄), 명(冥)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말 ‘하늘’의 음을 빌려 하날(漢捺), 한을(汗兒) 등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그리고 여름하늘을 호(昊), 가을하늘은 민(旻)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시경>의 ‘모씨전(毛氏傳)’에서는 “임금처럼 받드는 것을 황천(皇天), 원기가 광대한 것을 호천(昊天), 인자하게 덮어주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을 민천(旻天), 위에서 아래를 보살피는 것을 상천(上天), 아득히 푸르른 것을 창천(蒼天)으로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만물에 명과 복을 내리는 크고 밝은 하늘이 호천이라면,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하소연을 들어주는 하늘이 민천, 가을하늘이다. 순 임금이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밭에 나가 통곡하며 불렀다는 하늘이 바로 민천이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성어 ‘천고마비(天高馬肥)’가 흉노족이 살찐 말을 타고 약탈을 일삼은 역사 기록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눈이 부시게 화창하고 청명한 이 가을날, 여전히 기댈 언덕도 없이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의 소식을 들으며 ‘천고청비(天高聽卑)’라는 성어를 떠올린다. 하늘은 높이 있지만 낮은 곳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아담하고 따뜻한 언덕을 만드는 일을 더 이상 국가나 관련 기관에만 맡기고 말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운외창천(雲外蒼天), 구름 너머 푸르른 하늘이 찬란하게 펼쳐지는 희망을 다시 꿈꾸게 만드는, 가을하늘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연재 | 송혁기의 책상물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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