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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달이 환하고 깨끗하며 은하수가 하늘에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방에 사람 소리 하나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날 뿐입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밤을 연상하게 하는 고즈넉한 풍경이다. 중국 송나라 때 문장가 구양수가 한밤중에 책을 읽다가 갑자기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오싹해져서 아이에게 이게 무슨 소리인지 나가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나가서 본 풍경은 이처럼 인적 없는 맑고 푸른 가을 달밤이었고, 소리라고는 그저 나무 사이에 이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고요한 밤, 구양수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이렇게 놀란 것일까?

구양수가 들었다고 느낀 소리는 분명히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철썩 내려앉는 파도 소리였고, 쇠붙이가 이리저리 부딪치며 철커덩 쟁그랑거리는 소리였으며, 수많은 병사들이 적을 향해 숨죽여 질주하는 발소리였다. 아이의 말을 듣고서야 구양수는 깨닫는다. “아, 슬프구나. 이는 가을의 소리로다.”

봄이 따뜻하게 만물을 소생시킨다면 가을은 엄숙하게 만물을 쇠락시킨다. 그 기운이 워낙 살벌해서 숙살(肅殺)이라고 표현한다. 오행으로 치면 차가운 쇠붙이이고, 오상 가운데는 엄정한 의로움이며, 관원으로는 형벌을 집행하는 형관(刑官)에 해당된다. 가을은 용병의 상징이기도 했다. 군대를 정비하고 사냥을 나가거나 불의한 세력을 응징하는 정벌 전쟁을 벌이는 일 역시 가을에 이루어졌다. 구양수가 나무 사이 지나는 바람 소리에서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와 살기등등한 병사들의 소리를 들은 것은 그런 인식이 깔려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무는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숙살의 계절에 쇠락을 받아들여 잎을 떨구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근심을 온통 짊어지고서 몸과 정신을 혹사하다가 늙어간다. 봄과 여름만, 어두움 없는 낮만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찬란했던 한때의 젊음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저 불현듯 성큼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 앞에서 잠시 소생과 숙살의 순환, 확산과 수렴의 조화를 떠올리며 긴장된 우리의 마음을 이완시켜 볼 일이다. 오래된 문학이 그 바라봄의 거리를 벌려주기를 기대하면서.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연재 | 송혁기의 책상물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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