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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가정의 탄생

opinionX 2017. 11. 9. 10:52

지난겨울의 노량진은 좀 특별했다. 활어 수족관 대신 스티로폼 박스가 주욱 늘어선 도매시장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하는 친구 따라 간 덕에 TV에서나 보던 경매도 직접 봤다. 귀공자처럼 스티로폼 박스 사이를 누비며 필요한 물건들을 찍어 놓은 그와 시장 뒤편 포장마차로 향했다. 겨울바람에 강바람까지 더해진 노량진에서 그 허름한 포장마차는 이글루처럼 느껴졌다. 상인과 경매인, 트럭 운전사 등 새벽 시장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모여 드는 곳이었다.

어둑한 내부를 연탄 난로가 덥혔다.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나가는 이들이 있었고, 손맛 좋은 이모가 프라이팬 하나로 만들어내는 계란말이 등을 안주 삼아 소주 한 병 비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 틈에 비집고 앉아 친구가 가져온 고등어를 난로에 구워 소맥을 말아 마셨다. 팔도에서 모여든 이들이 나누는 새벽의 대화는 어떤 활어보다 싱싱했다. 난방 따위 없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찬물에 손을 대야만 살아가는 이들만의 치열함은 난로보다 뜨거웠다. 난 그때 옆에 있던 일행에게 말했다. “이게 진짜 삶이라는, 그 무엇 같아.”

막상 쓰려니 민망한 그 대사를 친 일행과 연애를 하게 됐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복잡하다면 제법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연애를 제법 해봤으나, 이전과는 좀 달랐다. 결혼한 사람들에게 가끔 듣는 “왠지 이 사람 하고는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프러포즈를 했다. 승낙을 받은 후엔 일사천리였다. 시간에 가속도가 몇 배로 붙었다. ‘그래도 한참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청첩장을 찍고 있었다. 마치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에 들어와있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보면 식장에서 사진 찍고 있을 거라고 하더니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을 앞둔 사람들의 최대 고민이 시작됐다. 청첩장을 어디까지 돌려야 하나, 몇 년 만에 연락해서 결혼 소식을 전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누구나 했을 그런 고민들. 그런 나에게 한 선배는 말했다. “판단은 상대의 몫이야. 일단 연락하는 걸로 너의 몫은 끝이고.” 그 말에 따라 연락처를 쭉 훑었다. 세상에, 꿈에도 몰랐다. 내 전화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번호가 들어 있을 줄은. 이 사람이 누군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번호도 엄청났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는 자기 얼굴이었던 프로필 사진이, 아기 사진으로 바뀐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술잔을 부딪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추려내던 중, 역시 한 인생 선배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결혼을 앞두면 반드시 자기 삶을 되돌아볼 때가 생겨. 넌 나이가 있으니 더할 거야.”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자기 얼굴 대신 아이 얼굴을 정체성으로 내건 사람들은 진작 깨달았을 사실일 테다.

마치 텔레마케터라도 된 양 계속 전화를 돌렸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카톡까지 동원했다. 다들 이래서 카톡으로 청첩장을 보냈으리라. 그때마다 섭섭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김씨를 거쳐 박씨 정도까지 왔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는 여자친구와 노량진으로 향했다. 지난겨울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에게 도매시장의 세계를 알려준 친구와도 함께했다. 다시 이글루 같은 포장마차에서 우리는 소맥을 마셨다. 시큼한 섞박지와 계란말이, 동태찌개, 목살볶음 등을 이모는 계속 내왔다. 손맛이 여전했다. 시장의 풍경 또한 여전했다. 여전한 풍경과 맛에 취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집으로 돌아올 사람이 있다는 것만 달라졌다.

여자친구는 침대에 누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삶을 되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 같아.” 그 말을 하루의 유언처럼 남긴 후, 그녀는 잠들었다. 왠지 찡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존재가 생긴다는 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이게 진짜 삶이라는, 그 무엇 같았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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