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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 주목받은 이는 작곡가 윤이상이 아닐까 싶다. 매년 봄이면 그의 고향에서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TIMF)’가 오페라와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을 집중 조명한 것은 물론이고, 여러 오케스트라와 앙상블의 정기 연주회, 독주회와 독창회 등 크고 작은 음악회들에서 1년 내내 그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클래식 음악계는 매년 탄생·서거 몇 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들로 넘쳐나지만, 20세기 한국 작곡가의 음악이 중심에 놓인 적은 별로 없었다. 서양음악 도입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이제 우리도 100주년을 기릴 만한 작곡가를 갖게 된 것이다.
작곡가 윤이상 (출처:경향신문DB)
이뿐이 아니다. 서울문화재단은 ‘프롬나드 콘서트’를 기획해 서울 도심 곳곳에서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인간 윤이상의 모습을 담담히 풀어낸 연극 <상처입은 용>(이오진 작, 이대웅 연출)을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은 경기도립극단은 서울에서도 재공연을 했으며, 서울오페라앙상블은 동백림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600일간을 다룬 나실인의 창작오페라 <나비의 꿈>을 선보였다. 하지만 촛불집회와 탄핵으로 변화된 정국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광범위한 윤이상 재조명이 가능했을까? 작년 연말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좌초 위기에 처했던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몇 달 후 추경예산 편성으로 기사회생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지휘자 성시연이 이끄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베를린음악축제’ 초청 윤이상 공연에 경기도지사와 도의회 의장까지 동행한 것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1970~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윤이상의 음악은 국내 연주자에게는 물론이고 내한 공연 온 외국 연주자의 프로그램에서도 삭제되곤 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4년 예음문화재단이 주최한 ‘윤이상 음악축제’를 계기로 그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윤이상을 ‘친북인사’로만 여긴 정치세력은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분단과 냉전 체제에 온몸으로 맞서며 상처투성이가 된 음악가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에 관한 왜곡과 음해는 사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민족의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세대, 불혹의 나이에 유럽 유학을 떠나 10년 만에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자마자 국가권력에 의해 납치되어 간첩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예술가, 전 세계 음악인과 지식인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독일로 돌아간 뒤 음악으로 남북의 평화 공존에 기여하려 한 이상주의자, 음악은 ‘진실하게 살려는 처절한 노력의 표현’임을 평생 간직했던 작곡가. 낡은 이념 프레임에 갇힌 우리 사회는 아직 한 예술가를 그가 처한 역사적 조건과 시대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윤이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초기 가곡집 <달무리>에서 마지막곡 ‘에필로그’에 이르는 120여곡의 작품만이 아니다. 모순에 찬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그의 존재는 분단과 냉전 체제에서 형성된 이념 대립을 넘어설 때 온전히 평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과 문화의식이 얼마나 성숙해 가는지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100주년을 맞아 윤이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났지만, 그의 음악은 많은 이들에게 아직 낯설게 다가온다.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후반은 어느 때보다 새로운 음악어법이 모색되던 시기였고 그 역시 한국의 음 관념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방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올해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여 선보였듯이, 윤이상의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이제 우리 음악인들의 몫이다. ‘예악’ ‘무악’ 같은 역동적인 관현악곡이든, 자전적인 첼로 협주곡이나 ‘밤이여 나뉘어라’ 같은 강렬한 메시지의 곡이든, 특유의 음향제스처로 표현된 실내악곡·독주곡이든, 아니면 한국에서 쓴 가곡·동요·교가든, 윤이상의 음악 한 자락을 즐겨 들을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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