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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연구자 권김현영이 신간 <미투의 정치학>에 쓴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 - 진보 남성의 미투 운동에 대한 이해”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재판을 내내 모니터링하고 연구했다. 안씨는 1심 공판 최후 진술 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지위가 타인의 인권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당시 그는 무죄를 확신한 듯 진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이 한 마디만 남겼다.

무슨 뜻일까. 진부한 비유지만,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다?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핵심 논리이기도 한 “나는 권력자이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지위의 존재와 행사를 분리한 비문(非文)”이라는 권김현영의 분석이 없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은 강제 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권력은 이데올로기, 어쩔 수 없는 조건, 사회 구조 등에 의해 자가 발전(發電)하는 공동체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설령, 갑이 위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격적인 사람이라 해도 위력은 존재 자체로 작동한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 아닌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1심 재판부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권력에서 자유로운 집단인가. 모든 업무를 동의와 합의로만 진행하는가. 당신들은 고시 동기생이 진급하면, 직장을 그만둘 만큼 권력에 민감한 집단 아닌가? 군인들도 동기생이 먼저 승진하면 전역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문화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인간관계는 권력관계다. 권력 개념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삶에는 힘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 갑을의 처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지금 한국사회는 ‘갑을’을 넘어 ‘갑을병정’의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다.

살아남기 위한 자발적 복종, 다양한 협상과 전략은 인간의 오래된 생존 방식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모두 공기와 같다. 이것을 뿌리 뽑는다는 발상, ‘근절(根絶)’은 관념이다. 인간의 몸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권력관계가 조금이라도 상식적, 합리적, 인간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땅콩 회항’, ‘라면 상무’, 양진호씨 사건,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이러한 상황은 권력자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노동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공도동망의 길이다.

성폭행은 인류의 역사와 그 시간이 같기 때문에 오히려 탈역사화되어 ‘남녀 관계’로 변질되어 왔다. 당대의 미투 운동은 노동 시장 문제다. 안희정씨 사건은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다. 이 사건은 많은 남성들이 생각하듯 개인의 ‘여자 문제’가 아니다. 일국 내부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용 자체가 몰락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다. 직장 내 권력관계는 개인의 인격과 생사여탈권을 좌우한다. 미투는 생존권 문제다.

안희정씨 사건은 노동 시장에서 성별 권력이 작동한 전형적인 예다. 고용, 급여, 근무 조건, 경력 문제 등 노동 문제를 남녀 간의 성(性)문제로 둔갑시키는, 이 권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가해자의 입장이 그토록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별(젠더)은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지만, 남성 사회는 ‘여자 문제’, 피해 여성 문제로 치부한다. 성별은 남녀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만일 ‘여성 도지사-남성 비서’ 관계도 위력은 존재하겠지만, 여성이 성폭력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드물다.

권력 개념은 유동적이다. 갑과 을은 고정되거나 팩트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피해자라고 다투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 위계의 그물망에 걸려 있다. 나를 포함하여 언제든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성차별이나 계급 양극화 외에도 연령주의,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 노동자 차별 등 다양한 힘의 관계가 각축한다.

사실, 이 글의 주장은 제목에 있다. 나는 안희정씨가 본인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3심으로 가져가지 않았으면 한다. 2심 이후 안씨 부인의 행동은 민망했다. 노동 인권 사안을 ‘불륜’이라고 주장하는 행동이야말로 윤리적이지 않다. 유일한 명예 회복은 조용히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3심 판결과 상관없이 그는 문귀동 형사, 신정휴(우 조교사건), 조재범, 김기덕, 고은, 이윤택씨처럼 각계의 성폭력 가해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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