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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송창식의 ‘사랑이야’ 노랫말(2절)이다. 여기서 ‘당신’은 누구일까. 사랑은 짧다. 연인일 가능성이 가장 작다. ‘당신’에 정체성, 적, 상처, 습관, 질병… 어떤 단어를 대입해도 말이 된다. ‘당신’은 내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평생의 화두가 아닐까. 득도하지 않고서야 ‘당신’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인생이요, 역사다. 인생고(人生苦)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알아도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고민이 멈추지 않는 상태다. 

트럼프를 보면서 ‘한반도의 당신’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1866년 조선은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號)를, 1871년 강화도에서 미군을 물리쳤다. 당시 삼화현감 이기조는 미 군함 세난도호 함장 피비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은 우리 강토와 백성들을 차지하려는가, 아니면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대의 소원을 말하고 아무것도 감추지 말라.”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하라? 미국이 속마음을 말하겠는가. 조선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열강 앞에 무력한 모습.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미국에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반미, 친미, 비미(批美), 용미(用美), 숭미(崇美), 모미(慕美), 탈미(脫美)…. 이 언설의 경합은 우리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반영한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현대사에서 미 군정기 3년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최초의 미군 범죄는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항에 도착한 바로, 그날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조선인 두 명을 총살했고, 미군은 이에 감사했다. 환영 인파는 흩어졌다. 미군은 일본의 보호 속에 등장했다. 몇 시간 후 환영차 인천항에 나온 조병옥, 장택상, 정일형 등 연합국환영위원회 대표들에게도 미군은 총을 겨누고 접근을 막았다. 미군과 조선의 첫 만남은 살상과 무시였다. 

그 뒤로도 미국은 떠나지 않았고 군부 독재 세력은 미국을 뒷배 삼았다. 한국인들은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조금씩 ‘당신’,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과 동화되어 가고 있다. ‘미국병’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미국은 ‘친밀한 적’ ‘짝사랑하는 적’ ‘욕망하는 적’이다. 우리는 문화적, 심리적, 지적으로 개성보다 뉴욕을 훨씬 가깝게 느낀다. 아직도 미국의 주(州)가 남한을 포함하여 51개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2018년 4월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이루어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제 트럼프 관련 뉴스가 피곤하다. 그가 주도하는 ‘밀당’, 아니 강대국의 농간(‘전략’)이 지겹다. 지난 15일에도 북측이 밝힌 3차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트럼프는 “대화는 좋은 것”이라고 반복하면서도 “그러나 빨리 가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좋은 관계다, 대북 제재도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1960년 8월,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 하루바삐 나가다오. … ” 그의 지친 분노가 들리는 듯하다.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이처럼 다른 시각과 캐릭터의 지도자가 함께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 바로 기회요, 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책임이나 탓의 차원이 아니다. 북한이나 미국은 어쩔 수 없는 ‘그들’이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아무리 지정학이 문제라고 하지만, 약소국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캘리포니아주의 2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땅조차 둘로 갈라졌지만, 약자 필패가 필연은 아니다. 중국을 이고 사는 베트남은 약소국이 강대국을 슬기롭게 대처한 좋은 사례다.

반미와 친미의 이분법을 넘어 ‘우리 안의 미국’을 뒤돌아볼 시기다. 

그런데, 새로운 미국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나타났다. 이언주 의원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죽음은 문재인 정권의 책임이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겠는가. 계급혁명에 빠진 좌파 운동권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계속되는 그의 몰상식이 원래 사고방식인지 선거 전략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조 회장의 사인은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사망했으니 신미(信美), 미국을 믿으라고 해야 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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