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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이해했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도리스 레싱의 말을 빌리면, 용서란 이런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용서도 할 수 없다. 호미 바바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re-member)은 사지(四肢)가 재조합되는 환골탈태의 과정이다. 기억과 용서는 이토록 힘든 일이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가 지난 11일 법정에 섰다. ‘광주 학살’ 이후 39년 만이다. 치매와 감기 등의 이유로 출석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다 법원의 강제구인에 따라 광주지법 201호 대법정에 선 것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로 ‘80년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정치인의 활동을 봉쇄하고(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언론인과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정(肅正)했다. 언론인만 711명이 해직되었다. 말이 숙정이지, 독재 국가의 소위 숙청(肅淸)이었다. 내 아버지 이름이 이 명단에 있었다. 우연이 겹쳐, 고교 교사였던 엄마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교직을 그만두셨다. 맞벌이였던 우리 집은 생계부양자가 사라졌고,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소송비용으로 없어졌고 부모님 모두 백면서생인 덕분에, 나는 종종 서무실로 불려가는 학생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학 생활은 5공화국과 함께였다. 휴교, 최루탄…. 사복 경찰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공부, 여행, 모색 같은 개인의 삶은 없었다. 그냥 상황에 휩쓸렸다. 이후 내 삶의 기준은 오로지 “20대처럼 살지 않으리라”였다. 나는 전두환씨에 대한 증오를 잊은 적이 없지만 ‘광주분’들 앞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동갑인 지인이 “난 대학 생활이 좋았어. 그때부터 소비 사회였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책상에 뛰어올라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동시대의 기억이 이렇게 다르다. 전두환씨는 “하필 내가 그때 대통령이어서… 피해자는 나”라고 주장한다.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부정론자들은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난징대학살은 없었다, 군 위안부는 없었다, 문서가 없거나 없어졌으므로.” 고통을 경험한 사람의 증언을 ‘종이’로 묵살하는 것이다. 물론, 실증과 실증주의는 다르다. 기록된 역사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기록도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이다.

생존자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 전두환씨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행태는, “잊지 말자”는 다짐 정도가 아니라 기억을 둘러싼 비상사태임을 의미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내전 중이다. 역사가는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라고 말하는 임지현의 신간 <기억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는 이 문제에 대한 흥미진진한 세계사다. 사실(寫實)이 사실(史實)로 만들어지는 사태에서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주체적으로 연루할 것인가를 묻는다.

식민 지배를 겪은 이후, 많은 국가들이 ‘진실과화해위원회’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었다. 내 의문은 이것이다. 진실과 화해는 양립할 수 있을까, 과연 진상 규명(facts finding)이 가능할까. 진실은 곧 화해로 연결되는가? 오히려 ‘진실’ 자체가 더 문제는 아닐까.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가 달라지고 연구자나 정치권이나 ‘기억 비스니스’에 분주하다. 얼마 전 군 위안부 주제의 학회에서 많은 발표자들이 “제가 위안부 전문가는 아니지만…”이라고 서두를 시작했는데, 기억 연구를 둘러싼 다른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억투쟁은 정의를 위해서이지, 피해자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수록 “우리가(내가) 가장 피해자” “완벽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결국 피해자는 또다시 고통받는다. 강자는 고통을 연구하고 ‘성찰’하지만, 약자는 고통을 경쟁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누구에게? 가해자에게? 그러므로 기억전쟁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경험이 의심받고 부정될 때, 피해자는 이중적 자아를 갖게 된다.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가 분리되는 것이다. 진실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동체의 산물이지, 처음부터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기억전쟁>에 의하면, 유대계 폴란드인 역사가 비톨트 쿨라(Witold Kula)는 1980년대 초 이렇게 예견했다고 한다. “예전에 유대인들은 돈과 자질, 지위, 국제적인 네트워크 때문에 질시를 받았다면, 지금은 강제수용소의 소각로 때문에 질시를 받는다.” 인류가 기억의 연대보다 피해의식을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는 인정받지 못하고, 피해의식만 넘쳐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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